감정을 억누르고 주님께 묻기
(사무엘상 30:1~15)
우리는 감정에 얽매어 살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순간의 서운함, 순간의 분노와 같은 감정으로인해 그릇된 판단을 하기도 하고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안에서 다윗이 겪은 엄청난 사건 앞에서 다윗이 행한 행동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다윗은 블레셋와 아기스에게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살아갑니다. 블레셋은 늘 이스라엘과 전쟁으로 대치하고 있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으로 망명한 다윗은 참 애매하고 어색한 상황에 놓여있어던 것이죠.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또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고 그때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도 함께 그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죠. 이제 자신의 동족과 전쟁을 해야만 하는 그런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좋게 보지 않은 블레셋 방백들이 아기스에게 다윗과 함께 전쟁에 나가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만약 다윗이 배신하여 우리를 공격하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라고 말하여 아기스가 다윗을 돌려보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자리를 떠나게 된 것이죠. 여기까지가 어제의 본문인 29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을 보니 다윗이 사흘만에 시글락 지역으로 돌아왔는데 이 지역이 다윗과 그의 무리들이 거하는 거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성은 불사르고 여인들은 모두 잡아갔던 것이죠.
정말 당황스러울 일입니다.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억지로 이끌려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와보니 이번엔 아말렉 족속들이 모든 여인들을 사로잡아 간 것입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하나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좁은 시각에서는 아말렉 사람들이 여인들을 죽이지 아니하고 데려간 이유는 그 여인들이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연약한 여인들이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려가서 자신의 노예로 삼거나 혹은 노예로 팔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죽이지 아니하고 여인들을 살려서 데려간 것입니다.
넓은 시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이 다윗과 함께 있었던 그들에게 은혜로 주어졌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일반화 시킬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시고 품으시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위협들과 불안함들 속에서 거할지라도 주 날개 밑 아래로 품으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다윗은 시편에서 이와 같은 고백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23편의 노래 중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음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라는 말씀으로 다윗은 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셨던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 사실을 다윗이 알지 못하였겠죠. 그래서 4절의 말씀을 보니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도 없이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울 힘이 없어 지칠 때까지 울었던 것이죠. 다윗의 아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다윗과 함께 전장에 나갔던 군인들이 자녀를 잃고, 아내를 잃은 분노와 슬픔 때문에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감정에 쉽게 휘말리는지 이 대목을 보아서도 알 수 있죠.
다윗을 따라나선 인물들은 다윗의 요청이나, 요구로 인하여 따라온 용병 같은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상을 묵상하면서 이미 알고 있지만, 다윗이 지켜주었던 그일라에 있던 사람들이 육백명이 일어나 다윗을 따라 나섰던 것이었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가축까지도 다윗과 함께했던 소수의 용사들로 말미암아 그들을 구원하여주었습니다. 그 중에 그러한 용맹함과 리더십에 반하여, 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사건들을 통하여 다윗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래는 아말렉이 쳐들어왔고 아말렉으로 인하여 자신의 자녀와 부인들이 빼앗겼는데 그 화를 엉뚱한 다윗에게 풀고 있는 것이죠. 이미 화는 나있고 이 분노를 표출해야 하고 그리고 그 책임을 질 대상을 찾다보니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을 책망하고 그를 죽이자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감정대로 다윗을 돌로 쳐서 죽였다면, 영원히 그의 자녀들과 아내는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도 너무 당황하였겠죠. 성경에는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히브리어 야차르 라는 단어는 곤란하다. 난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라고 마음이 괴롭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아내들도 동일하게 납치당하였고, 그리고 그들을 이끌던 리더십은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용사들이 돌을 들어 자신을 쳐 죽이려고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다윗이 놓여져 있었던 것이죠.
다윗이 할 수 있는 상식적인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먼저는 그들과 대적하여 잘잘못을 가리는 것입니다. 내가 그랬습니까? 여러분의 아내와 자녀들을 내가 납치하여 갔습니까? 아말렉이 한 잘못이 아닙니까? 왜 여러분은 나를 따른다고 하면서 나에게 이런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양심이 있다면 양심에 맞게 상황 판단을 하고 그래도 내 잘못이 맞다면 나를 돌로 쳐 죽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시오! 라고 말했을수도 있겠죠.
두 번째로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그들을 어르고 달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와 아내 뿐만 아니라 내 아내도 납치되었습니다.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처지입니다. 우리가 다 동변상련 아닙니까. 돌을 내려놓고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작전을 짜던지 그들을 급습하던지 해야할 것 아닙니까? 빨리 모여서 회의를 합시다. 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도망가는 것이죠. 이 상황을 도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어 광야에서 유리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위의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방법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곤란하고 난감한 상황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7절과 8절의 기록이죠.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우리는 급하게 난처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이 상황에 압도되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모든 시선을 빼앗기게 됩니다. 결국 문제가 나를 잠식하고 나를 먹어삼키게 되어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속단하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상황에서 이 문제를 붙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참 깊게 와닿았는데요. 아바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 라고 말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죠. 아마 에봇 안에 있는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신탁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신탁의 과정을 본인이 직접 수행합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기에 제사장에게 신탁을 묻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이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서 신탁의 결과를 전달해주는 일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신탁의 과정을 본인이 직접 하나님과 관계하여 물어보고 8절의 말씀을 받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라고 정확하고 명확하게 응답하여 주십니다.
왜 다윗은 이 신탁의 과정을 본인이 직접 수행하였을까요? 아비아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본인이 책임져야 할 책임을 완수하고자 하는 책임감을 성실하게 본인이 감당해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의 주도권과 책임감을 소홀히 여기거나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우리가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열심을 다하지 않을까요? 왜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착각할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굳이 에봇을 입고 있는 다른 제사장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룩한 직분을 존귀하게 여기며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죠. 다윗이 에봇을 가져오라 하여 그것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감정대로 일을 행하고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무서워서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들과 적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눈치를 보거나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급박하고 난처하고 난감한 상황에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와 태도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 문제와 갈등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인생길은 늘 문제투성이고 갈등투성이입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대로 화를 내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돌로 쳐 죽이려하는 삶을 살 수도 있고, 또한 우리는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주님 제가 어찌 해야 할까요? 라고 묻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 선택이 내가 주인이 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책임을 내가져야 하지만, 그 선택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살아야 하는 삶임을 기억하며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무엇일까요? 신뢰할 수 없는 나의 감정과 분노는 주님께 올려드리고, 나는 내가 감당해야할 일을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해 주신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또 설교를 통해서, 내 마음에 감동하신 그 감동을 따라서 그 일을 겸허하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 기도의 자리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다 알고있죠. 하지만 실제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은 기도의 자리를 통해서 성령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을 우리의 심령과 영혼에 가득히 채우는 자리가 바로 기도의 자리인 것입니다. 다윗을 향해서 저들을 추격하라 하시면 추격하는 것, 추격하지 말라 하시면 그 또한 주님의 뜻으로 알고 멈추어 서는 것을 배우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인 것이죠.
내 욕심과 감정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고 하나님 이거 맞죠!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거죠!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 어찌해야 하나요. 저는 할 수 없으니 저를 도우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그 시간 그 자리를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이 찬양을 고백했으면 좋겠는데요.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입니다. 정말 주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추하고 연약한 제 모습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온전히 주님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라고 이 찬양으로 우리의 기도를 올려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