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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다윗과 아비가일

by 터틀곽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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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아비가일

(삼상 25:14~22)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광야에서 지내면서 나발이라는 인물이 잔치를 벌일 때 그 잔치음식을 좀 나누어 달라는 전령을 보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한 이후에 다윗이 나발을 치러 올라가는 그 여정 중에 있는 본문입니다.

 

다윗이 보낸 전령들이 아주 홀대를 받으며 돌아갔다는 소식을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듣게됩니다. 14절에 기록되어 있죠.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그리고 그 종은 이 사실과 더불어 그들이 다윗과 함께 지냈을 때,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자신을 선대 하며 지켜주었다는 사실을 함께 말하는 내용이 15절과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그들을 소중하게 지키었는지 16절에 보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나발의 목자들을 지켰던 이유는, 다윗이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긍휼한 마음과 자기 민족을 보호하고자 하는 그런 의로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다윗 자신도 사울에게 쫒기는 신세였지만, 그렇게 심적 여유가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발의 목자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들이 양을 치던 곳이 바로 마온지역이었고, 그들은 광야로 나가 양들을 쳤었는데요. 이 마온 광야 남쪽에는 베드윈 족속과, 아람 족속들의 약탈과 노략행위가 빈번했던 장소로 보여집니다. 그렇기에 나발의 목자들은 언제라도 도적 때와 이방 민족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도록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죠.

 

실로 다윗은 자신의 처지가 누구를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고 거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긍휼과 의로움으로 나발의 목자들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느끼기에 밤이고 낮이고 담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성벽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 안정감을 누렸다는 것이죠. 그만큼 성실하게 나발의 목자들을 지키었습니다.

 

다윗이 어떤 댓가를 바라고 이와 같은 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다윗이 나발을 먼저 찾아가서 너희가 광야에서 양이나 염소를 치다가 이방 민족에게 위협이나 어려움을 당한다면 우리가 도와줄 터이니 얼마의 급여를 주라. 라고 말한다던지, 아니면 굳이 그렇게 부드럽게 나갈 필요 없이 깡패들이 자릿세를 걷는 것처럼 내가 너희 목자들을 지켜줄테니 얼마씩 조공을 바치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일체 그러한 조건이 없이 나발의 목자들을 지켜주었고, 나발이 배설한 잔칫날에 전령들을 보내어 먹을 잔치 음식을 조금 구하자 아주 매몰차게 홀대를 한 것이죠.

 

이 사실을 나발의 종이 그의 여주인이자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그 사건을 전하며 아마이러이러하여 다윗의 부하들이 우리에게 처들어 올 것을 전하여 줍니다. 이 모든 사실을 들으 아비가일은 급하게 떡 덩이와 포도주와 양과 건포도와 무화과를 가져다가 나귀에 나눠 싣고 나발이 알지 못하게 다윗을 향하여 길을 나섭니다.

 

아비가일이 나발 몰래 행한 이유는 만약 이 사실을 나발이 듣게 된다면 분명히 자신을 못 가게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나발의 성품의 어떠함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비가일은 곧 다윗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이미 다윗이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나발을 지킨 것이 다 허사로다.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고 있구나. 나발에게 속한 남자 가운데 한명이라도 남긴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며 반드시 그들을 진멸하리라는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죠.

 

아비가일은 잔뜩 화가난 그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이러한 예물을 준비하여 다윗에게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 등장하는 나발과 아비가일을 통해서 몇가지 교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나발의 미련함입니다.

 

나발의 이름의 뜻이 미련한, 어리석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발은 이름 그대로 미련한 행동을 하였는데요. 그것이 바로 다윗과 그의 용사들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나발이 과연 다윗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당연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소유와 재산이 많기는 하였지만, 세아림을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은 아니었습니다. 252절에 보면 양이 삼천마리 염소가 천마리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셈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이죠. 그리고 이렇게 셈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의 소유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종들이 목자의 일을 하고 있었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는 목자들을 통해 그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도적떼를 만나 양을 몇 마리 잃었고, 어떤 어떤 일들이 있었음을 듣고 있었겠죠. 그런데 다윗이란 인물이 등장한 이후에는 그런 손실이 생기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나발의 종들도 가서 다윗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했었겠죠.

 

하지만 그 호의가 계속되자 그것을 권리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지켜주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없죠. 다윗이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나발은 그 호의를 당연한 권리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무슨 돈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잔치가 벌어지는 날에 그 잔치에 찾아가 자신을 낮추어 자신과 함께한 이들을 종이라 칭하고, 자신을 나발의 아들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며 잔치 음식을 베풀어 주기를 원했지만, 그 고약하고 그릇된 심성의 나발은 자신이 누렸던 그 선한 대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매도하며 멸시하고 있었던 것이죠. 결국 그것이 다윗의 화를 돋구는 일이 되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입은 것을 가벼이 여기면 안됩니다. 은혜를 입은 것, 누군가가 우리를 선대하여 준 것, 우리를 도와주거나 기꺼이 도움을 베풀어 준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쏟아부어야 하기도 하며, 또 재정과 물질을 사용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받고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은혜갚은 까치, 은혜갚은 호랑이, 은혜갚은 두꺼비, 등등 한국의 우화 중에는 은혜 갚은 동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같은 우화가 쓰여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동물들도 은혜를 입으면 그 은혜를 갚는데, 그렇지 않은 인간이 너무나 많으니 동물을 보고 배워라. 은혜를 잊으면 동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것 아닙니까?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이며 여주인이었습니다. 나발만큼 외부적인 일들을 앞장서서 하지는 않았던 인물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종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부랴부랴 음식을 장만하여 다윗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음 본문에 등장하지만, 결국 그러한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나중엔 다윗의 부인이 되는데요.

 

다윗은 지혜로운 아비가일의 행동을 본 이후에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비가일을 불러 자신의 아내로 삼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또 잊어서는 안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 많은 인생 가운데 복음을 듣게 하시고 내가 지음바 된 창조의 목적과 참 인간의 모습을 깨닫게 하신이가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신 것으로 이 땅 가운데서 살아가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이 은혜를 잊고 살아가는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시편 50편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들이 당할 종말은 두려운 종말입니다. 하지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발과 같이 호의를 권리로 아는 몰상식한 인간이 아니라 은혜를 은혜로 깨닫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가 받고 누리는 것 중에 은혜로 누리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질문2.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혹은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도움의 손길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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