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곽군의 느릿느릿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모든 날, 모든 순간.

by 터틀곽 2023. 1. 1.
728x90
반응형

창조주를 기억하라. 모든 날, 모든 순간.

(12:1)

 

유독 이번 2022년은 빠르게 지나간 것 같습니다. 매년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올해만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늘 한해를 마무리 할 때가 되면, 벌써 1년이 이렇게 흘러갔구나.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12월달은 우리가 큐티 본문으로 전도서를 함께 묵상하였는데요. 공교롭게도 오늘 2022년도의 마지막 날이 전도서의 마지막 장인 121절부터 마지막절 까지가 오늘 큐티의 본문입니다.

 

아마 생명의 삶 편집위원들이 한해의 마지막 큐티를 전도서로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편집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전도서의 말씀은 그만큼 삶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과 근본적인 질문들, 그리고 전도자가 바라본 인생의 허무함들, 그리고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할 삶의 지혜들이 담겨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런 지혜가 담긴 마지막 단락에서 전도자는 어떤 말을 남기고 싶었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전도서의 마지막장인 12장의 시작은 기억하라! 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기록된 전도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도자가 이 전도서를 기록하면서 어떤 경구를 사용하고 어떤 단어들을 어떠한 구조로 배열하였는지를 이번 한달 동안 살펴보았습니다만, 전도자는 편하게 생각나는대로 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정제된 언어로 이 지혜의 문헌을 기록하여 배열한 것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죠.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 세심함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요. 전도자는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 엘로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어떠한 신적인 능력, 전능한 신 혹은 신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는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전도서의 마지막 장인 12장에서는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창조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너의 창조자, 히브리어로는(보르에카) 라는 어휘는 남성 복수 분사 형태에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입니다. 좀 어렵죠. 그런데 이 단어가 주는 의미가 중요한 이유는 이와 같은 표현 방식이 유일하게 전도서에서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주적인 힘과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너의 창조자’. 라고 표현하면서 모든 우주적인 힘과 능력을 가진 초월적인 하나님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서 너와 관계가 있는 분.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 관계하시는, 친밀하신 하나님’.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신적 존재와 개인을 이어주고 있는 구절이라는 것이죠.

 

두 번째 단어인 기억하라는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명령은, 단순히 그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라는 명령은 단지 감상에 잠겨서 그땐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어떤 추억이나 예전의 일을 회상하거나 기억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전도서 12장에서 말하고 있는 기억하라. 라는 명령은 신앙적인 명령임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 온 모든 일생을 천천히 살펴보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의 여정 전체를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미 지금까지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지나간 세대는 잊혀질 것이고 또 다음의 세대도 기억되지 않을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는 기억하라! 라는 명령을 사용하면서 잊혀지지 않고 변하지 않을 절대적 진리, 절대적인 기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허무함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하여 너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나와, 너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당시의 독자들은 유대, 이스라엘 민족들이었죠. 이 전도서가 쓰여진 시기를 포로기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고요, 솔로몬 저작으로 본다고 해도 B.C 930년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역사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을 뽑으라 한다면 출애굽하여 홍해와 광야를 건너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나아갈 때 그들이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 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하지만 이 전도서가 쓰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언약백성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이 언약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갔을 것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고 출애굽 세대도 죽었고 광야 세대도 죽었으며 여리고를 정복한 세대도 죽었고 가나안을 정복한 세대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의 백성들도 죽었고 사울왕 때의 사람들도 죽었으며 다윗의 세대의 사람들도 죽었을 것입니다. 죽은 세대는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도자는 허무하다 하였죠.

 

자신들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과 야곱으로 또 이스라엘로부터 그의 열두 아들과 열두 지파로부터임은 인식하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과 함께 하셨던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 채 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오늘의 1절 말씀을 통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은 온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나와 너,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강조함과 동시에 인간의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우리의 시작은 하나님이며 우리의 끝도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곧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현세의 삶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며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본문은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하면서 세 가지 때를 얘기합니다. 첫 번째는 너는 청년의 때 너의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합니다. 또한 곤고한 날, 고생스러운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 곧 사는 날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왜 전도자는 왜 이 세 가지 시기를 들어서 말씀을 전하고 있을까요?

 

전도자는 때에 민감한 인물임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죠. 모든 것이 때가 있다. 라고 말하는 구절은 전도서에서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죠. 그래서 이 때와 시기에 대해서 전도자는 깊은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젊음의 때 우리가 창조주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해석과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젊음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젊음은 때로 미숙함과 어림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젊음만큼 또 생기있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젊음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활력이 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기입니다.

 

또 그 시기는 가장 행복한 시기, 열정적인 시기, 내 힘이 있는 시기입니다. 넘어져도 다시 금새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충만한 시기입니다. 그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힘이 있을 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보통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전도자는 젊음의 때에 청년의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젊음은 영원하지 않고 잠시 피었다 지는 들풀과도 같고, 아침에 잠시 끼는 새벽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인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겸손할 수 있습니다. 젊다고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우리를 창조하신 이를 묵상하면서 나의 기력과 아름다움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하게 만듭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그 누구라도 고난과 곤고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닥쳐오는 고난이 크건 작건 사람마다 그의 인생에서 이 고난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일이 닥치기 전에 창조주를 묵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 어떤 문제라도 하나님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여러 문제 앞에서 당당하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고난에 잠식되거나, 마음이 낙심되거나 좌절하지 않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통해 나를 온전케 하실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리고 불쑥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이 찾아오기 전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묵상하고 인식하는 훈련이 되어있다면, 그 고난의 바다와 파도 속에서 주님과 함께 항해해 나아가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는 것에 낙이 없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 삶이 즐겁지 않다고 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쇠하여집니다. 인간이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섭리입니다. 이 섭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전에 우리의 창조주를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송구영신예배 때가 되면 꼭 이 찬양의 가사가 기억이 납니다. 오늘도 예배전에 부른 찬양이죠.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나를 위해 예비하신 본향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내일이면 또 한 살을 먹으니 나는 또 한 살 늙어가는구나, 그러면 하나님을 뵈올 날이 일년 또 가까워졌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죽음 앞에 순서는 없지만, 늙어감이라는 수순 앞에서 그렇게 나는 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아직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지 못하여 이 지혜를 깊게 통달할 수는 없지만, 나의 기력이 쇠하여 가고 늙어가고 병들어가는 것은 참 슬프게 느껴진다고 생각합니다. 가까이에서 보자면 큰 산 같았던 아버지가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을 바라볼 때, 인생이 허무하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더이상 아름답지 않고, 육신은 후패해지고 기억력은 쇠퇴하고 소망이 없는 듯 할 날이 다가와 인생이 무상하다. 인생은 정말 너무나 허무하다. 라고 말하기 전,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갈 소망을 가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이후 전도서의 마지막은 종말론적인 상황들을 지속적으로 묘사하면서 이 세계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으며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다시 한번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전도서의 마지막 13절과 14절에 전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젊음의 때, 고난의 때, 노년의 때가 오기 전, 그리고 그때를 마주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에 귀를 귀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까? 모든 날, 모든 순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022년의 마지막 날, 그리고 새로 다가오는 2023년의 날 그리고 이 시기를 넘어 지금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면서, 또한 앞으로의 남은 우리의 생애를 인도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시면서 모든 날, 모든 순간 하나님을 바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곽군의 느릿느릿'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1) 2023.01.11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1) 2023.01.06
말과 말의 힘  (0) 2023.01.01
모두가 같은 운명  (0) 2022.12.26
하나님 자녀의 영광  (0) 202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