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
(빌 1:22~30)
어제의 본문을 통해 바울의 상황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혀 고난 받았지만 오히려 그 일들로 인해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 나가길 소망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길 원한다는 고백, 자신의 죽음 조차 유익함임을 고백하였던 바울의 고백이었죠.
오늘의 본문도 계속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21절에서 이미 바울은 옥에 갇힘으로 인해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까지 말하였었죠.
하지만 오늘인 22절에서는 그러나, 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공동번역이 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인데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정말 많은 사역을 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제외하고 신약성경에 기록된 서신서의 대부분이 바울의 저작인 것을 보아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바울의 삶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헌신이었던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23절을 보면 바울의 마음을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의 본심은 아마 21절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거쳤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바울이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기록한 내요잉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도 없이 맞고 여러분 죽을뻔 하였다. 유대인에게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고, 여러 여행 가운데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바다의 위험 광야의 위험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라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얼마나 수고스러운 인생입니까? 누가 바울더러 그렇게 살라고 억지로 끌고 다닌것도 아닌데 바울은 스스로 복음에 매인 인생이 되어 그 고생을 자처하면서도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육신의 옷을 벗어던지고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자신에게 씌우실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며 영원토록 주님과 더불어 기쁨과 영광 가운데 지내게 될 것인데, 그러니 나의 죽음이 어찌 유익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라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척도를 바로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나는 정말 아무런 미련 없이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있는가? 주님 오심을 정말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꿈꾸고 있는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는 것을 그토록 소망하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그 누구보다 간절히 소망하고 있던 인물이었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으며 오히려 죽음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는 인물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소망하고 바래왔지만 이 땅에 남겨질 교회 공동체로 인하여 이 땅에 더 머물러야 할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과 26절입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살 것과 라는 말은 나는 계속해서 삶을 영위해 나갈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 공동체에 남겨진 이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더하여 주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내가 다시 여러분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를 더욱 자랑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이와 같이 자신이 교회 공동체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것이죠. 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한다. 너희를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나에게는 더욱 유익하지만,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이 땅에서 삶을 계속 살아갈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와 함께 바울은 사랑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체들을 섬김과 동시에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신앙 안에서 세워가기 위해서 그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27절 이후의 기록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공동체를 향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함께 하던지 떠나 있던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협력하라를 함께 싸우라로 번역하였는데요. 이유는 28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소식을 듣고자 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하는 자들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모든 이들을 말합니다. 유대교의 교리를 따르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복음의 신앙을 흔들고 깨뜨리는 일들을 주도 하였고 많은 이들을 미혹하여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은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각 교회를 신앙 안에서 바로 세우기 위해 여러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며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하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8절을 조금 더 살펴보면요. 대적하는 이들과 함께 싸워 승리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이지만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고 독려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떠나지 말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 안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늘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공동체 안에서 받는 핍박으로 인한 두려움과 또 이제까지 믿어왔고 지켜왔던 율법적인 행태를 버리고 믿음이라는 가치를 우선적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예배의 전통과 신앙 습관이라는 것이 참 바꾸기 어려운 것이거든요. 제가 올해인가 작년인가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요.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예배 드렸던 이십년 전의 예배의 형태와 단 하나도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던 것이죠.
그런데 갑자기 이건 예배의 형태가 바뀌는게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 새로워지는 것이거든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 사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중에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 신앙 안에 있는 것이 구원의 증거이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죠. 그리고 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그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두려움을 벗어던지가 강력하게 싸우고 저항해야 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2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였는데요. 비슷한 번역을 사용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개역개정은 은혜로 번역을 하였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받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런데 또 다른 특권이 있는데 그것은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이라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고난은 특권이 되는걸까요? 특권은 특별한 권리 아닙니까? 특권을 누리는 것은 무언가 나에게 이득이 되고, 다른 이들과 구별된 특별한 대우를 받을 때 이 특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은 특권이라고 볼 수 있지만 고난을 받는 것을 특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신자들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아파하고 고통받는 것 이것은 사랑의 가장 큰 행위이며 표현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나를 희생하는 것, 그것은 사랑으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표현이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와 사랑의 표현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특권으로 보았습니다. 이유 없이 고난을 받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게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의 고백이며 이는 어떤 피조물도, 천사들도 할 수 없는 유일하게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우리 신자들로서만 가능한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30절에서도 너희에게도 이와 같은 싸움이 있다. 내가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금까지 싸우고 고난받았던 것처럼. 너희도 나와 같은 싸움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 말하며 그들의 신앙을 위로하고 또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여러 형태로 다가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바울이 받았던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도 있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내가 받게되는 불이익이 있을수도 있고, 또는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고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게되는 이 모든 일련의 행위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특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특권은 이 땅에서의 삶이 다하고 언젠가 영광 가운데 주님을 뵈올 때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으로 바꾸셔서 의로운 세마포와 함께 우리를 싸매실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온 마음다해 주님을 섬기며, 주님을 사랑하기에 받게 되는 여러 고난과 역경들도 특권으로 여기며 여전히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질문1.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이 세상에 매여있는 어떤 것들인가요? 나는 그리스도를 즐거이 따르고 있나요?
질문2.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내가 받고 있는 고난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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