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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by 터틀곽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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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4:1~10)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싸움과 다툼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먼저 야고보는 신자들 간의 분쟁의 원인이 정욕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요.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1절 말씀에 보면 싸움과 다툼 두 가지 단어가 등장하는데요. 싸움은 직역하면 전쟁들 이고 다툼은 싸움들입니다. 야고보는 1절 본문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이 다툼을 단순한 언쟁이나, 감정 소모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계속 적인 적대관계를 말합니다. 서로 죽이고 정복해서 무릎 꿇리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결과는 패배한 쪽이나 승리한 쪽이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죠. 야고보가 볼 때 신자들 간의 불화와 분쟁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과 속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들이 논쟁과 분쟁이 있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야고보는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체는 몸의 각 부분이 연합되어 있는 유기적인 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마 처음 시작은 다툼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욕심이 되고 욕망이 되다 보니, 전쟁과 같은 것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그 욕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데요.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게 되면 살인을 하고. 탐내고 시기하여도 가지지 못하니 다투고 싸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살인을 실제적인 살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쟁의 이미지가 서로를 죽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살인을 한다는 단어를 쓴 것일수도 있고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을 빗대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서로를 죽이는 살인이 아니더라도 야고보 사도는 이 사태의 심각성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고 과장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적인 사실을 그대로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야고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얻어내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야 할 것이라고 2절 하반절과 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죠.

 

욕망에 지배되는 삶은 스스로의 삶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파괴합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해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너희가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을 위하여 구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새번역에서는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구하기 때문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들이 정욕적인 것, 혹은 쾌락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구해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응답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닌 사탄이 파놓은 함정이며 올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하였고, 의로운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하셨고, 또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의 간구를 들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끔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에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라는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기도의 영역을 혼돈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요. 이 말씀은 그 앞구절을 반드시 선행해야만 합니다. 이 말씀의 선행구절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분별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우리가 구하는 것들을 응답하시겠다는 말씀이 기록된 것이죠.

 

계속해서 야고보 사도는 세상과 벗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 사도는 두 번째로 세상과 벗된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은 간음하는 여인들아. 라고 말하면서 남편이신 하나님을 떠나 간음하는 여인들과 같은 교회 공동체를 훈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이 간음한 여인 같은 존재 인가요? 자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자신의 이해 관계에 유익한 것들만 구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들이 세상과 벗된 존재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신자도 예외가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악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타락한 세상과 극명하게 구별된 곳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반대되는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과 반대되는 곳을 향하여 가는 이들이기에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는 이 점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세상의 것들인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 다투고 싸우는 신자들을 향해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규정하면서 신자들에게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이와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후 야고보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가 세상과 짝하지 말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의 말씀이죠.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 충만함으로 내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위에서 간음하는 여인들이라고 신자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을 먼저 살펴보았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신랑이시고 남편되신 모습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이 변함없으심을 늘 우리의 전 존재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질투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과 짝하여 갈 때 하나님이 느끼시는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신자들, 비단 초대교회 공동체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 분명하겠지만요. 성령께서 질투하고 사모하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헛된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다는 말씀이죠. 하지만 이미 세상을 사랑하기로 세상에 마음이 빼앗겨버린 신자의 마음은 이미 정욕적이고 세상을 향해 가 있기에 예배당에 와 앉아 있을지라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뿐더러 정욕으로 구하기에 응답을 받을 수도 없는 존재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6절에서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를 사용하면서 그와 반대되는 가르침을 개진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누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까?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이습니다. 나아가서 7절과 8절의 말씀을 통해 신자의 바른 자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신자는 세상과 벗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으로 이끌고 가려 하는 마귀를 대적하며 싸워야 합니다. 신자들과 전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적하고 싸워야 할 대상은 사탄 마귀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열심히 싸운다고 해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싸우는 대상을 바르게 알고 싸워야 합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는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열정과 열심은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또 지체를 사랑하는 곳에 쏟아야 하며, 또 우리의 싸움은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8절 하반절부터 10절까의 말씀을 통해서 서로 다툼이 있는 신자들, 세상과 벗하고 있는 신자들, 정욕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실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를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개만 하면 다 용서하여 주실 거야. 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 죄를 완전하게 씻기시고 용서하시는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손을 깨끗이 하며,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죄와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의 삶의 자세를 개탄하면서 신자들의 무감각해진 영혼의 상태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의 자세는 상한 심령이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너무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도 좋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자세는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히 행할 때 주님은 다시 우리를 높이실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툼과 분쟁은 없지만, 많은 교회들 안에서 나타나는 분쟁과 다툼이 세상의 정욕에 의한 것임을 기억하면서 반면 교사로 삼아 우리는 지체와 함께 연합하며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의 삶의 자세를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가 구하는 것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인가요? 아니면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질문2.

나는 마귀를 대적하고 있나요?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나요? 내 삶의 자세는 누구와 더 가까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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