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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모두가 같은 운명

by 터틀곽 202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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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같은 운명

(9:1~10)

 

오늘 9장의 말씀은 8장의 내용과 이어지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8장에는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자 인가? 라는 이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탐구의 마지막 결론이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으로서는 능히 알아낼 수 없다. 라고 탄식함이 8장의 내용이었죠.

 

이후에 91절에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이는 81절의 누가 지혜자인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전도자의 해답을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땅에서 이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고민해보고 탐구하였으나 전도자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의인이나 지혜자나, 모두 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안에 있음과 그들의 앞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 어떤 사람이라도 앞일을 아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때때로 점술가들이나 무당들이 앞일을 점친다고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 행위를 확증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뱉어내는 추측성인 대답에 사람들은 일어나진 않은 일 때문에 부적을 쓰고 굿을 하고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미래를 정확하게 아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2절의 말씀에는 모든 사람은 하나의 운명을 가진 운명 공동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운명은 곧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같은 운명을 아래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의인이던 악인이던, 잘났건 못났건, 돈이 많건 적건, 좋은 일을 했건 나쁜 일을 했건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전도자는 다시 한번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죽는다는 이 말은 불변하는 사실이고 진리지만 사실 듣기에 거북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허무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인이건 악인이건 똑같이 죽는다. 라는 이 말은 그닥 소망이 있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너가 선하게 살면서 선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이를 도우면서 살아도 언젠간 죽어. 너가 나쁜짓을 하면서 악한 일을 행하면서 남을 압제하고 억압해도 너는 언젠간 죽어. 이것이 사실이라도 의인과 선을 행하는 이들이 이 말을 들으면 좀 억울해 하지 않을까요?

전도자는 누가 죽는 것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였을까요? 아니면 정말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일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와 같은 내용을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사람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보기에는 사람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 평생에 광기를 가지고 있다가 결국 죽는자에게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이것이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래전 인류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 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타락하고 깨어진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함이 없습니다.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예례미야도 탄식하였던 것이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도자는 죽음 앞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는 이 사실이 가장 허무하고 잘못된 일이라는 고백을 함으로써 이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이 사실을 악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닥쳐올 종말, 곧 죽음이라는 것은 일상의 평화를 깨뜨리고 급작스레 다가옵니다. 신앙 안에 있던 사람이던 세상 안에 있던 사람이던 정결함과 부정함의 구별도 죽음 앞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결정적으로 삶의 모든 구별됨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만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이와 구별에 구분을 두지 않고 평등하게 만드는 수평 장치와도 같습니다.

 

결국 인류는 그의 평생에 광기와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의인이던 선인이던 악인이던 행악자건 죽은자 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가 마주할 운명이라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전도자는 이와 같은 죽음을 앞둔 인류 앞에서 그 허무함을 악하다고 말하며 끝내는 것이 아니라 4절에서는 삶의 가치를 옹호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다.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과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의인이던 악인이던간에 누구나 죽는다. 이것이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가 갑자기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낫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저번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전도자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전도자가 일관성 없이 계속해서 말을 바꾼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양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양방향의 현상들을 각각의 입장에서 동등한 방법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합니다.

 

전도자는 줏대 없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양극적인 삶의 현상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 양편에 서보려고 하는 지혜자였던 것이죠.

 

이제 4절부터 다시 살아있음을 예찬하며 죽은 사자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고 말합니다. 이 예는 극명하게 갈리는 예입니다. 사자와 개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사자는 엄위와 힘과 강함의 상징이며 개는 그냥 개일뿐이죠. 하지만 살아있는 개가 죽어있는 사자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힘과 위용도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것임을 예로 들면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소망을 가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5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전도자는 다시 살아있음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전도자는 살아있음에 무엇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자는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라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개와 죽은 사자를 비교하듯 산자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생각하고 맞이하려 하고 준비할 수 있지만, 죽은 자들은 이제 아무것도 모른는 존재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은 어떤 상도 받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들은 기억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져 갑니다.

 

저는 저의 할아버지의 죽음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윗 세대를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본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죽은이들은 언젠간 기억에서 잊혀집니다.

 

나아가서 6절에서는 죽은 자들에게는 사랑, 미움 질투도 없을뿐더러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생전에 어떤 사랑을 했으며, 어떤 감정선에 있었는지, 또 그가 살았을 때 투자한 회사가 어떤 성장을 거두어서 성공을 했는지 모르지만 죽은자들이 받고 누릴 몫은 영원히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수레 공수거 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불교 용어죠. 이 말도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처럼 죽은자들은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어떤 상도 죽은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설령 죽은 이후에 받게 되는 훈장이나 명예가 있다 하더라도 죽은이들은 실제로 그것을 받거나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죽음을 향해 가는 모든 인류에게 살아있음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결정적인 한마디는 삶의 기쁨입니다.

 

7절부터 10절까지는 삶을 즐거워하라고 명령합니다. 전도자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는 전형적인 삶의 즐거움들의 어휘를 사용하면서 주어진 삶을 누리라고 명령합니다.

 

7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죠.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도자는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이 너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8절에서는 옷을 깨끗하게 하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서 용모를 단정히 가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는 말은 가장 근본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이 가진 즐거움 중에 가장 원초적인 즐거움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즐거움의 원천을 근본적인 행복을 누리라고 말하는 것이죠. 또한 용모를 가꾸라는 것은 삶을 잘 누리기 위한 준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도자는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낫다와 같이 무엇보다 무엇이 낫다는 비교법을 주로 사용했지만, 이 본문은 직접적인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이렇게 해라. 혹은 꼭 이렇게 해라 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원초적인 즐거움을 거세하는 것이 구별된 삶, 혹은 초월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금식하거나, 음식을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생식만을 하거나 하는 일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현재의 행복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절은 구약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도 찾을 수 없는 구절입니다.

 

머리에 향유와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단정히 하는 것은 축제와 즐거움의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름과 향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쓰여진 것이죠.

 

전도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음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라고 말하며 날마다 축제의 삶을 살라고 명령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이와 즐겁게 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도 포함되겠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즐겁게 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하면서 전도자는 수고의 보상을 맛볼 수 없는 죽음의 상황이 다가오기 전에 너의 삶을 누리고 행복을 마음껏 누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10절에서는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일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는 9절 하반절과 이어지는 말씀이기도 한데요.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이라는 구절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노동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전도자가 말하는 노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전도자는 노동의 가치를 부를 축척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동함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과 즐겁게 살아갈 것, 일상의 기쁨을 위해서 그 노동을 사용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닥쳐올 죽음 앞에서 아등바등하며 부를 위한 노동만을 위해 삶을 사용하지 말고, 살아있기에 노동하며, 그로 얻은 댓가들을 통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먹고 마시며 축제의 삶을 살아있는 동안에 살라는 말입니다.

 

이는 노동의 가치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주는 구절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노동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더 윤택하여지고 즐거워지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스올, 곧 죽음 이후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는 천국 소망 안에 살아가지만 구약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이해는 깊은 잠에 빠지는 것, 이는 어떤 장소적인 영역이 아니라 단순한 죽음의 형태를 말하는 이해이기도 한데요. 여기서 깊게 다룰 영역이 아니기에 나중에 기회가 되면 스올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고요.

 

전도자는 살아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누리는 먹고 마시는 즐거움, 또한 축제의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행복하게 즐겁게 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도자는 노동 또한 살아있는 이들이 누리는 축복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이 살아있음을 누려야 합니다. 전도자는 이것이 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또한 우리가 누릴 행복을 누리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이 살아있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인생을 사랑하는 이들과 아름답게 누리시는 저와 여려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것을 기억하는 인생이 될까요? 수고와 슬픔일까요? 기쁨과 즐거움일까요?

 

질문2.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계신가요? 나는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무엇을 누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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