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와 누룩으로 만드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13:10~21
오늘의 본문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이 말씀을 보면 누가복음의 흐름 상 생각나는 장면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11장에서 살펴보았던 귀신들려 말하지 못하게 된 사람을 치유하시는 장면이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1절에도 18년동안이나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요. 이 여인도 어떤 생물학적인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들렸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귀신이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 인간을 고통스럽고 괴롭게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불러서 안수하시자 병이 낫고 펴지는 놀라운 치유의 현장이 나타납니다. 자유케된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기뻐하는 모습이 13절에 기록이 되어있죠.
그런데 14절을 보면 회당장이 등장하는데요. 회당장은 회당의 책임자를 지칭하는 사람입니다. 공공 예배를 주관하는데, 성경을 낭독하거나 기도하고 설교할 사람을 지명하고 회당 건물, 가구, 두루마리 성경을 관리하는 자들을 감독하는 사람들이 회당장이었습니다.
초기 유대인들은 참 많은 구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전통들, 겉 껍데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유추해볼수도 있습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율법교사들도 있고, 바리새 운동을 하는 바리새파도 있고,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도 있고 또 그 위에 제사장과 대 제사장도 있었죠. 또 랍비라고 하는 선생들도 존재했고요. 서기관도 있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회당장은 꽤 높은 직급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모습 다시 말해서 18년동안 귀신에게 억눌려있던 한 사람을 치유하여 자유케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모습을 보고 분을 내고 있는 것이죠.
누가복음 11장의 내용과 비슷한 느낌을 받으시지요?
회당장의 요구는 무엇이었습니까? 14절을 살펴보니 일할 수 있는 날이 엿새가 있는데,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아야지 왜 굳이 안식일 날에 와서 이런일을 행하느냐! 라고 말하는 것이죠.
18년이라는 세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가요? 그가 회당에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18년동안 꾸준히 회당에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회당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제사도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그 여인은 자유 하지 못했으며 계속 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오랜 시간 동안 귀신에게 얽매여 있던 그녀는 단번에 치유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쁜일인가요? 모두가 축제와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겠지만 회당장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 회당을 주관하고 회당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회당장은 안식일을 두둔하며 왜 안식일에 일을하는가! 라고 말하면서 분을 내고 화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치유와 자유가 18년동안 귀신에게 매어있던 한 영혼을 치유하셨는데 그것을 보지 아니하고 왜 안식일날 그 일을 하였냐면서 오히려 성을 내는 모습이 회당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안식일의 본질, 율법의 본질을 알지도 못한채 그 겉 껍데기만을 중요하게 여겼던 회당장의 외식함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15절 16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너무나 당연하고 당연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회당장을 따르며 안식일에 일하신 예수님을 반대하던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다른 온 무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이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겨자씨와 누룩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채소밭에 심기 워진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가장 작은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것이 바로 이 겨자씨입니다. 실제로도 너무나 작은 것이 겨자씨이죠. 좁쌀보다도 더 작은 것이 이 겨자씨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를 채소밭에 심었더니 작고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커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비유로는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과도 같다고 하십니다. 이 가루 한말이면 100인분의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말이면 엄청난 양이죠. 이 많은 양의 밀가루를 모두 부풀게한 누룩과도 같다고 하십니다.
이 겨자씨와 누룩은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전복성과 확장성을 의미합니다.
18년동안 귀신들려서 펴지 못하는 여인은 회당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까요? 귀신들렸기에 정상적이지 않고 침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고 몸을 베베꼬던 여인은 불쌍히 여김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저주를 받았을까요?
아마 후자이지 않았을까요? 저 여인은 저주를 받았다 저주를 받았기에 저렇게 귀신들려있지 않은가? 라고 정죄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이 한 여인을 들어 치유하심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십니다. 당시 회당에 모인 수 많은 사람 들은 이 한 여인의 치유됨으로 인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보통 겨자씨는 밭에 심지 않습니다. 더욱이 채소밭에는 심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 겨자는 관상용으로도 땔깜으로도 쓸 수 없는 덤불같은 형태를 띕니다. 율법을 해석하는 미쉬나에서는 겨자씨를 다른 씨와 섞어서 정원에 뿌리는 것을 율법으로 금지했다고 합니다. 덤불은 한번 자리를 잡으면 놀랍게 확장되어 버리기 때문에 채소밭에서는 잡초로 여겨지고 뽑혀서 불에 태우는게 일반적입니다.
누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빵을 만들 때 이 누룩을 얼만큼 넣냐면 찻스푼으로 반스푼만 넣어도 엄청나게 발효가 됩니다. 반죽 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이 누룩이 들어가게 되면 그 반죽은 전부다 발효가 되어버립니다.
아죽 작은양의 누룩이지만 반죽 전체를 발효시키는 것이 이 누룩 이스트가 하는 일입니다.
이 겨자와 누룩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누룩은 거짓교사나 악한이들을 지칭하는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런 부정한 단어들을 통해서 회당에 모인 회당장을 비롯한 유대지도자들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연약하고 억눌려 있는 소외되고 적은 무리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계속적으로 확장되어 갈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각자가 겨자씨와 같은 누룩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르게 느끼겠지만 우리는 참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 아닙니까? 훌륭하신 분들도 많겠지만 저는 참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겨자씨 같이 작고, 누룩과 같이 적을지라도 그 작은 믿음의 고백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부족하지만 작은 나의 믿음과 헌신과 사랑을 통해 우리 공동체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하게 만드는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 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질문 1.
우리 교회공동체는 전통에 매인 교회인가요?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깨뜨려진 옥합과 같나요?
질문 2.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이 연약한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으시나요? 나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준비되고 있나요?
'곽군의 느릿느릿'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굳게 붙들어야 할 소망 (0) | 2022.08.26 |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1) | 2022.08.26 |
잘못된 근심과 올바른 근심 (1) | 2022.08.25 |
율법교사야, 마르다야 (0) | 2022.08.25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0) | 2022.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