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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by 터틀곽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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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그중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는데요.

 

첫 번째로는 52절부터 56절까지에는 사마리아인들과의 갈등관계를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장면이 등장하고요

 

두 번째로는 57절부터 62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름의 진지함에 관해서 가르치십니다.

 

오늘 본문 51절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의 저자는 51절에 승천하실 기약 이라는 문구를 사용함으로서, 예수님이 감당해야 하실 수난의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주, 하나님 보좌에 올라가실 주님의 모습을 그리면서 예수님의 승리를 미리 선포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습니다.

 

 51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은 약속을 따라서 오신 분임을 알 수 있는데요. 이는 승천하실 기약이 찼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한시도 잊으신 적이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또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시고 하늘로 승천해야 함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죠.

그렇기에 승천할 기약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으시고 이제 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은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자신의 의지를 활용하여 굳게 결심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사역의 정당성에 대해서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무게와 고난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분이셨을 것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고통과 고난의 무게를 미리 알고 있고, 나의 죽음의 과정과 끝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괴롭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이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의지적인 굳은 결심과, 약속의 성취에 대한 온전한 순종의 두 모습을 통해 구원받게 된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날마다 우리의 믿음과 결단을 주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먼저 사마리아의 마을로 보내시는데요.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의 갈등의 관계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이 54절에 이렇게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시는 장면을 우리가 수요일 설교로 들었는데요.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는 장면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목격을 하죠. 9장에서는 베드로가 이상한 헛소리를 하더니 이번 10장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열왕기하 1 10절 아래로 살펴보면 엘리야를 잡으러 온 사마리아 왕의 군대에게 명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군대를 살라버린 사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의 현현을 보았던 야고보와 요한이 의기양양하여 자신들을 거부하고 있는 저 사마리아인들을 향해 그때처럼 불을 내리도록 기도할까요?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그러자 55절에서 예수님은 돌아보며 그들을 꾸짖으셨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다른 사본에는 이르시되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오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 라는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말씀임과 동시에 우리가 경계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이 무엇인가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솔로몬 왕 이후에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이 나뉘면서 열두지파가 둘로 쪼개집니다. 하나는 유대와 레위족속으로 다른 하나는 나머지 10족속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혈통을 잘 지키는 것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열 지파는 주변 나라들과 혼인도 하고 동맹도 맺으면서 혼합정책을 수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사마리아인들 그 이외에 혼합정책으로 정체성이 모호해진 다른 지파들을 업신여기고 깔보고 사람취급을 안했던 것이죠.

 

그리고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그들을 불살라버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돌아서 그 길을 통과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사마리아인들을 꾸짖거나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본에 기록된대로 오히려 멸망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예수님의 사역들을 살펴보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 다른 이방인들을 향해서도 구원의 손길을 베푸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정말 많은 갈등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대와의 갈등이 있고, 가치관의 갈등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들도 이런 갈등상황에 일조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 비기독교인들중 특별히 젊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좋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죠. 뭐 다른 여러 이유들도 있지만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혐오적인 프레임으로 인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어떤 교회들은 특정한 대상들을 혐오하고 사마리아인 취급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단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더러 다른 교회들은 사랑과 온유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혐오와 정죄를 가지고 그들을 상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정치적, 혹은 젠더 갈등을 유발시키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무리에게 혐오의 프레임을 씌워서 특정집단을 물리치고 깨부수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새울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온 사마리아 여인을 어떻게 만나주셨는지, 혐오의 대상이 된 남편이 다섯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어떻게 품어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실천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우리는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2절부터 5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에 대해 분노나 폭력적인 것에 대해 거부하시는 말씀을 하셨다면 57절에서 62절까지의 말씀은 그를 따르려거나 추종하려는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조건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더욱 엄격하고 타협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이 세상이 생각하는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기준입니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 가족과 작별하는 것 등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임에도 예수님께서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쟁기를 잡은 농부는 고랑을 파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고랑을 만들기 위해서는 앞을 바라보며 나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요구를 넘어서 온전한 헌신의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51절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굳게 결심한 사실을 우리는 먼저 묵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겠다고 결심한 이후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향해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상기시켜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쓰라린 최후를 마칠 때까지 철저한 자기부정과 고난의 길을 걸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음을 만나지 못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서 자신을 도리어 욕하고 저주하고 방해하는 영혼들을 향해서 한 없는 사랑으로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거나 갈등을 유발시키는 대상이 있나요?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실 수 있으신가요?

 

질문2.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난 후 나는 어떤 결단과 헌신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나요? 내가 세운 제자도의 기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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