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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율법교사야, 마르다야

by 터틀곽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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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 이 두 가지 장면이 등장합니다. 먼저 25절부터 37절까지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담론이 등장하고요, 이후에 38절부터 42절까지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담론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영생에 관련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율법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라고 되물으시죠. 그러자 그 율법교사가 토라의 핵심인 신명기 6 5절을 줄줄 외웁니다.

 

토라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27절에 기록된 대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래 그것이 옳다 너의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대로 끝났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라의 핵심 자체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약에서는 율법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일치하며 오히려 예수님은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더 구체적으로 더 강화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교사의 다음 행동에 등장합니다. 29절인데요.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라는 질문을 합니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저녁기도회를 통해서 누가복음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누가복음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갈등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한 이 율법교사는 당연히 유대인이죠. 이 유대인이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이웃 또한 훌륭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을 파악하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안다. 라는 말이 있잖아요? 끼리끼리 논다. 라는 말도 있고요. 그것처럼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부류와 친해지고 유대감을 형성하려는 그런 습성이 있습니다.

 

이 율법교사도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은 율법교사인 것 다시 말해 자신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고, 율법에 대해서 능통하고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웃 또한, 이와 같은 부류였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웃이란 단어의 뜻은 실천적인 의미로서 신앙의 동료 또는 정치적, 종교적 동지들 혹은 정당 동지들을 의미했습니다.

 

이들 율법교사의 특징 중 하나는 이 종교적인 열심을 내느라 신앙의 문제와 율법의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면서 누가 더 율법으로서 바른가? 라는 정의를 내리는 것이 이 율법교사들의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 전통을 세우고, 율법의 경계를 세우면서 자신들의 기준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정죄하고 깎아내리는 일을 하는 이들이 율법교사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웃사랑의 참 의미인 어렵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자신의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비슷한 율법교사들과 회당에 모여 논쟁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 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죠.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 율법교사를 향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교사를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거의 죽을 정도로 때려놓고 옷도 벗겨놓고 갔다. 그런데 제사장이 보고서 그냥 지나치고, 레위인도 보고 피해서 지나갔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교사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죠. 그런데 그와 대비되는 인물로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아주 극혐하는 사마리아인을 들어서 어떤 사마리아인이 이 강도만난 자를 데려다가 치료해주었다. 이 중에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인가? 라고 율법교사에게 되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자이다. 라고 말하죠. 사마리아인입니다. 라고 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자입니다. 라고 말한 것은 차마 사마리아인입니다. 라고 대답하기 창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율법교사를 찌르는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토라를 잘 암송하고 있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며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 내 이웃이 누군지 아십니까? 라는 의미를 담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던 것이죠.

 

율법교사가 원했던 대답은 너의 정치적 동지들, 신앙적 동지들, 율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너의 이웃이다. 라는 대답을 원했을 것인데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강도만난자의 비유를 들어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자의 친구이며 이웃이 되었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교회 공동체라는 이름을 가진 기독교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찔림을 받아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생각하는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분명히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의 직장동료? 혹은 나의 교회의 지체? 학교 동창들? 동네에서 함께 자란 내 친구들? 여러 이웃이 생각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누가 소외된 자들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비슷한 부류 안에서 커뮤니티를 이루면서 어떤 감정적인 유대감을 공유하고 안정감을 누릴 때 예수님은 누가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겠는가를 강력하게 물으시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가를 돌아보며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소외된자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마리아와 마르다가 등장하는데요. 잘 알고 있는 말씀이라 짧게 짚고만 넘어가고자 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40절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의 마음에는 두 가지 불만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이것은 본질을 놓쳤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왔기에 손님 맞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손님을 맞으려면 누군가는 손님을 영접해야 하고 그들이 있을만한 공간을 정리도 해야하고 식사 준비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장도 보고 요리도 하고 그릇정리도 하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말씀에 집중하고자 하는 태도가 없었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봉사의 일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자체를 받아들이고 영접하려기 보다 어떤 행사, 손님맞이 같은 일에 더 마음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마르다를 향해 너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몇 가지만 하던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몇가지, 한가지라고 하는 가짓수는 어떤 일의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주한 마르다의 마음을 진정시키시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두 번째로 마르다의 마음의 문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와 못마땅함 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가 못마땅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는 이렇게 분주하게 손님맞이로 바쁜데 저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마리아는 언니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그저 앉아서 편하게 말씀이나 듣고 있네. 라고 하는 못마땅함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 대놓고 저 마리아를 시켜서 저를 좀 도와서 일하라고 좀 하세요. 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을 하시면서 마리아를 두둔해주십니다.

 

상식적으로는 마르다가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 그쵸? 왠지 마이라가 뺄라져보일수도 있습니다. 일도 안 하고, 그저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는걸 보면 뭔가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아니꼬와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말씀의 기초위에 서 있는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수고와 섬김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이에게 인정을 받길 원하는 섬김이거나, 다른 사람이 그 섬김의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함을 갖는다면, 그 섬김은 결국 자기자랑과 자기만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나의 섬김과 수고가 온전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에 반응하는 섬김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인 관계가 먼저 수반되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없는 섬김과 수고는 자기만족과, 자기자랑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리아로 시작하여 성숙한 마르다의 자세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세우고, 이제 성숙한 자가 되어 마리아 자리에 앉혀야 할 이들에게 본인의 자리를 내어주고 감사와 기쁨으로 봉사의 삶을 살며, 나의 마음의 깊은 자리에는 언제나 저 마리아의 자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본문의 마르다를 넘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마르다의 자리에 다다르기까지 깊이있게 성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에겐 이웃이 있습니까?

 

질문2.

나는 순수하게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분주한 마르다인가요?

그리고 성숙한 새로운 마르다를 향해 자라가기를 힘쓰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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