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청소년부 아이들과 토요일마다 줌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직접 대면으로 하는 것보다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멀리 있는 예은이, 준범이도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제관이는 제가 집에서 부르면 내려옵니다.
어제는 기도에 대해서 나눴고 그저번주에 성경공부를 했었는데요. 주제가 성경이었어요. 주제가 밥은 안먹어도 말씀은 먹는다. 였는데요. 참 레디컬하고도 급진적인 제목 같다는 느낌을 좀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반대로 살고 있잖아요. 말씀은 안 먹어도 밥은 챙겨먹는다. 로 우리가 살아갈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면 부끄러울때가 참 많습니다.
아무튼 성경공부를 하면서 도입 부분에 여러분은 힘들고 지칠 때 여러분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 있나요? 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없다는 대답을 해주더라고요. 사람이 갑자기 물어보면 생각이 잘 안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질문을 좀 바꾸어서 그럼 아무거나 암송하거나 외우고 있는 말씀 있는지 물어봤어요. 창세기 1장 1절 정도는 외우고 있지? 라고 물어보았는데 용기있게 대답을 잘 못하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알고는 있는데 갑자기 정확하게 토시 하나 안틀리고 대답을 하려니까 막상 대답을 못했을거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육이 좀 그렇잖아요. 맞춤법에 예민하고, 주관식에 정답을 적을 때도 토시 하나 틀리면 틀리다고 처리하고 좀 관대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좀 쭈뼛 거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 아이들 암송 훈련을 좀 시켜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각인된 두 가지 기억이 있는데요. 이 둘 다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첫 번째는 청소년부때 수련회를 가면 성구암송을 안하면 밥을 안줬거든요? 여러분도 다 경험이 있으시죠? 진짜 먹는걸로 치사하게 그러면 안되는데, 뭐 이유는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죠. 그만큼 밥과 말씀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게 한 조에서 공동책임으로 한 명이라도 못 외우면 밥을 못먹으니까 미안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외웠거든요? 그래서 막 밥 늦게 먹으면 억울해서 울고 그러는 애들도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저도 수련회 때 식사 전 말씀을 외우면서 늘 불만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검사하는 저 선생님은, 저 전도사님은 저 목사님은 진짜 다 외우고 있을까? 자기들도 솔직히 못 외우면서 우리보고만 외우라는거 아니야? 라면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억지로 외워서 밥을 먹곤 했습니다. 또한 우리와 선두 경쟁을 다투는 다른 조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더 억지로 외웠던 기억이 있어요. 사실 딱히 좋은 기억은 아닙니다.
두 번째 기억은 군대에서 있었던 기억인데요. 제가 회심을 경험하고 정신을 좀 차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발적인 암송의 삶을 살아가기로 하고 군에 들어갈 때 네비게이토 60구절 100구절이 있는 암송 카드를 가지고 갔어요. 그래서 짬이 날 때마다 말씀을 암송하곤 했습니다. 제가 군 교회에서 아침에 찬양인도를 했었거든요? 찬양을 하기 전에 잠시 멘트를 했는데요. 여러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고 멘트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여기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뒤가 기억이 안나는거에요.
백명도 넘는 장병들이 아침에 억지로 끌려와서 피곤하고 짜증나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데 너무 당황했습니다. 그... 그 뭐냐 못박혔나니,,, 그 그... 하다가 저 뒤에 있는 다른 군종병에게 말씀 좀 찾아서 띄워주세요! 라고 급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의 본문이죠. 이것도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네비게이토 60구절 바로 2번째 장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분명히 외웠던 말씀이었는데 갑자기 기억이 안나서 굉장히 창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래서 억지로 암송을 시키고 하는게 좀 비인격적인 교육 아닌가? 젠틀하지 못하다. 학교 수업 외우는 것도 힘든데 내가 억지로 성경구절을 암송해야 하는가? 그때는 전도사가 될 줄 몰랐습니다만 내가 나중에 주일학교나 청소년부 선생님 되면 절대로 억지로 암송 같은건 시키지 않고 젠틀하게 주도적 학습으로 성경과 신앙을 가르쳐야지 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암송은 힘입니다. 신앙의 선배들께서 왜 그렇게 암송을 시켰는지 세월이 흘러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번주 주일날 청소년부 아이들에게 암송카드를 두 개씩 주었습니다. 이제 암송을 해서 말씀이 머리와 가슴에 새겨지고, 아이들이 나중에 성장해서 암송한 말씀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신을 일으켜주는 참 생명의 말씀이 되도록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을 결정하면서 어떤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까 많이 고민하고 기도하던 중에 암송했던 이 말씀이 떠올라서 장황하게 설명을 좀 드렸습니다. 오늘 주제가 성경을 암송하라도 아닌데 서두가 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교회 뒤쪽에 보면 한문으로 힘있게 쓰여진 글이 하나 있습니다. 저 글이 必生則死 必死則生 "필생즉사 필사즉생" 이라는 뜻인데요.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1597년 9월 15일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전인 2천여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 저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알고 계셨나요?
마태복음16:25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요한복음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라.
상관관계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 내용 자체가 담고 있는 뜻이 참 의미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참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더 값을 지불하더라도 정크푸드가 아닌 건강한 먹거리를 찾아 먹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기 위함이 아닌가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는 이유도 같은 이유입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함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이죠.
우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 안에서 정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백억원대의 부자라도 내 몸이 건강하지 못하여 병원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면 그 많은 돈이 어떤 위로가 되고 힘이 될까요?
우리가 아무리 유명인사라고 해도 죽음의 끝자락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다면, 그 유명함과 지위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렇듯이 살아있음. 생명이 있음은 그 자체가 복입니다. 우리가 살아있기에 이렇게 생동력이 있고, 희노애락을 누리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위와 같이 생명력을 잃어버린 삶을 살아간다면 행복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과, 교회의 뒤편에 걸린 액자와, 조금 전 함께 읽은 말씀은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다 라는 역설적인 내용이죠.
약간 혼동이 오죠? 어찌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살고자 하지 않고 죽고자 해야하는 것인가? 왜 그리스도인은 죽고자 하며 살아야 하는가? 임진왜란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형편도 아니고 평화로운 이 시대에서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잃으라고 하셨을까요? 왜 우리는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일까요?
인생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보세요 여러분 벌써 10월 말이라는게 믿겨지십니까? 21년을 시작한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벌써 내일부터 다니엘 기도회가 시작 되는게 믿어지시나요? 세월은 이렇듯 화살과 같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우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 가만히 이 땅에서 살아도 죽음을 향해 가는데요? 아니 가만히 있어도 죽어가는데 뭣 하러 죽으려 애를 씁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게 1차원적인 말씀을 하신게 아니겠죠.
위에서 말씀하신 생명은 프쉬케 라고 번역된 단어입니다. 프쉬케는 보통 숨, 호흡 등으로 번역되는데요. 이는 비오스 라고 하는 생명과도 연결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는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로 인하여 목숨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우리 목숨을 위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좋은 것을 먹고 운동을 하고 건강을 유지하면서 애를 쓰고 고생하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그 목숨을 잃으려 하는 자에게 그것을 찾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시작하고 있는데요.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죽임을 당한 것은 본래 내가 아니라 예수께서 감당하신 것이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대속제물로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과 희생, 고결한 피흘림이 대속의 조건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셨기에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고 이 부활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이 예수그리스도 자신 안에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죽음을 감당하셨고, 또 영생의 길을 부활로 확증하여 주심으로 구약부터 오랜 세월 동안 말씀하셨던 그 언약을 이행하셔서 그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진리는, 복음은 역설적인 믿음을 요구합니다. 세상은 목숨을 위해 잘사는 법, 건강하게 사는 법, 풍요롭게 사는 법 등을 가르치지만 오히려 예수께서는 죽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먼저 죽어야 다시 사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고, 내 목숨을 미워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기독교의 기본 진리 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날마다 바라보고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내 목숨, 생명의 죽음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나의 옛 자아를 죽였는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뜻은 내 옛사람을 나의 옛 자아를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내가 추구하며 살았던 나의 감정,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자아를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옛 자아가 죽었음을 날마다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내 자아를 나의 노력과 의지를 가지고 죽이려고 하면 온전한 죽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온전한 죽음이 아니라 내 마음을 꺾어 억지로 내 마음을 통제하려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내 열심으로 사랑하려 하고 억지로 희생하려고 하면 항상 억울함과 자기 의가 남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죽음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 못박는 다는 의미는 온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완전한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무위에 달린 예수를 보았을 때 저 예수는 분명히 죽었다. 라는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깊은 창이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모든 물과 피를 쏟았을 때 전혀 살 수 있는 가망성은 하나도 없음을 모두가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온전한 죽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의 정욕을 못박을 때 그것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도록 대충 또는 적당히 못 박으면 안됩니다. 나의 의로 억지로 억누르고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내 옛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랬을때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의 말씀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가 옛 자아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의 옛 사람을 못 박아서 죽음을 경험케 해야 합니다. 그 죽음이 있어야 진정한 부활의 생명의 깊이와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완전히 죽지 않아서입니다. 내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여전히 내 인생의 방향키를 내가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나이의 많고 적음, 배움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많이 배우지 못하였더라도 교회를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도 내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이들은 넘치는 생명의 은총과 하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교회에 출석했을지라도, 내가 많은 배움이 있고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지라도 여전히 내 자아가 살아 나의 정욕이 나를 이끌어가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예수와 연합된 삶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옛 자아를 온전히 버리기로 결심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 나를 온전히 의탁하고 내 인생의 보좌를 온전히 예수께 드리기로 결심하여 나를 예수님께 완전히 맡겨버릴 때, 옛 사람으로 살아왔던 것보다, 나를 부인하고 죽음을 경험해야 했던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은총과 참된 기름부음이 넘쳐나는 생명력이 우리 안에 부어짐을 경험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단번에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한 번에 우리의 옛 자아를 버리고 완벽한 새 피조물이 되어 완전히 새롭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번에 옛 사람과 자아가 죽어서 끝나버린다면 날마다 내 자아를 죽이도록 애쓰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면 더이상 죄의 문제로 고통받지 않아도 되고 고심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또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아직 살아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이 치열한 세상에서 나를 우겨싸는 무리 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나를 넘어뜨리려고 내 담장을 허물려고 하는 여우같은 사탄이 우는 사자같이 나를 삼키려 하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상황을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또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두 구절이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매순간마다. 깨어 살아가는 모든 순간 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사람, 옛 자아를 못 박을 때 우리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매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우리의 죄악스러운 본성을 날마다 순간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내 의지로 내 마음을 억지로 꺾어 내가 참아야지 나 정도 되니까 참는다. 라는 수준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 속에서 경험되는 죄와 정욕이 나를 침범할 때에 내 죄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바라보며 나의 죄도, 정욕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내가 죽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청개구리입니다. 청개구리의 특징이 뭔가요? 엄마의 뜻과 반대로 하는게 청개구리의 특징입니다. 그러다가 엄마 개구리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청개구리에게 나를 강가에 묻어달라고 말을 하죠. 엄마의 죽음 앞에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청개구리는 그제서야 순종하여 엄마를 강가에 묻지만, 엄마의 뜻은 자신을 산에 묻으라는 말이었던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합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안타까운 행동입니까?
청개구리 동화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처음부터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롭다. 라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도 어렸을 때 다 이 청개구리 동화를 듣고 자라지 않았습니까? 이 동화를 깨닫고 이후에 순종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잘 안 변합니다. 사람만큼 잘 안 변하는 존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 애들도 많이 읽어줬거든요? 안 변해요. 물론 저도 잘 안 변하더라고요. 그게 사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청개구리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때 그 순간에는 깨달은 것 같고 이해한 것 같지만 우리는 또 쉽게 잊어버리고 다시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반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만약 청개구리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계속 거꾸로 거꾸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 개구리의 죽음이 큰 사건이 되어 청개구리를 회개시키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오라 가족 여러분
우리에게도 날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도록 나를 향하신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을 날마다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우리의 정욕과 옛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참된 죽음과 놀라운 부활의 생명력이 우리 삶에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은 내가 애를 쓰고 내 마음을 꺾어 올라오는 정욕을 단순히 마음 수련하듯이 통제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죽음은 우리가 살아서 경험하는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감정, 정욕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 그리고 나의 기준과 평가, 이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인 윤리를 포함한 모든 전 존재를 의미합니다.
죽은 이들은 말이 없듯이,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듯이 그러한 죽음이 우리 안에 경험되어질 때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죽음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이 추하고 약하디 약한 존재 안에 존귀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의 말씀일까요? 이제 우리의 삶에서 나의 정욕과 나의 욕심과 이기심과 불평과 미움과 질투와 걱정과 분노가 올라올 때, 나는 정말 죽었는지 내가 아직 살아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욕들이 내 안에 다시금 올라올 때 날마다 죽어야 함, 날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가 묵상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오라 가족 여러분 저와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을 간절히 바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정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살아 숨 쉬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내 안에 사는 이 함께 찬양합시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 함이라
나의 왕 내 노래 내 생명 또 내 기쁨 나의 힘 나의 검 내 평화 나의 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 함이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고백합니다. 나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날마다 십자가를 붙들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 놀라운 인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치 말게 하시고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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