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맛이야.
추석 명절 잘 보내셨나요? 보통 명절을 지나고 나면 명절 증후군을 겪게 되는데요. 장기간의 귀향 과정, 가사노동 등의 신체적 스트레스, 그리고 관계에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 등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2년간 코로나로 인해서 서로 잘 만나지 못하니 시골에 계신 부모님들, 타지에서 생활하는 자녀들이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전해 받은 글귀가 있는데요. 좋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잠시 나누고자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거짓에 막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면 입을 마스크로 틀어막고 살라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했으면 거리를 두고 살라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손으로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어디를 가나 손 씻고 소독하라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열을 올리고 살았기에 가는 곳마다 체온을 체크하고 살라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비밀스럽게 다녔으면 가는 곳마다 연락처를 적으라 하시겠습니까?
반성하며 잘 살겠습니다. 노여움 거두시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세상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지금 코로나를 예방하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것들이 죄 가운데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코로나가 빨리 다스려져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언젠가 소원이가 자기 전에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빠, 하나님 믿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좀 놀랐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응 그렇구나! 소원이는 왜 하나님 믿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해? 라고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소원이는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하나님은 어디에 사시는 거예요? 하늘 위 구름 위에 계신가요? 아니면 우주에 사시는 거예요? 라는 질문을 다시 저에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응 소원아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계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어느 곳에든 계시는 분이고, 또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계셔. 그리고 언젠가 소원이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에는 지금 궁금했던 것들이 잘 이해가 되고 깨달아지는 날이 올 거야~ 라고 무언가 소원이 수준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 같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소원이는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려우신가요? 아니면 쉬우신가요? 이 세상에 쉬운 건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쉬운 게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대답이 없으신 거 보니 역시 다들 믿음이 좋으십니다.
오늘 이 시간 본문을 함께 묵상하면서 다윗의 삶을 돌아보며 다윗이 어떤 신앙을 갖고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중 하나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기록한 시인데요. 제가 예전에 이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무엘상 21절에 다윗이 사울을 피해 쫓겨 다니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아기스 왕 앞에서 침을 흘리고 대문을 벅벅 긁으며 미친 척을 하다가 쫓겨났던 일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는데요.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성경을 살펴보면 각 시편 앞에 언제 지어진 시인지 대해서 설명이 나오는 성경이 있을 거예요.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미친 척을 하다가 쫓겨난 이후에 지었다는 시가 바로 오늘의 본문인 시편 34편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시를 적겠습니까? 한 번 이 상황에 여러분의 인생을 대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장인어른이었던 사람은 원수가 되어 나를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대동하여 이 잡듯이 나를 찾으려 하고 있고 나는 척박한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돌다가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여 배를 채우고 또 다른 원수를 만나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척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여러분은 홀로 앉아 어떤 마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표현하시겠습니까?
사실 표현이 안 될 것 같아요. 정말 이 상황이야말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 상황 아닙니까?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려본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장담할 순 없지만, 우리 중에 누구도 이 정도 상황까지 내몰려 본 적이 있는 분들은 아마 없다고 생각합니다.
차마 이 괴로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글로 적을 수 없어 탄식 속에서 눈물만 뚝뚝 흘릴 것 같은 마음이 듭니다. 이때야말로 하나님 당신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렇게 고통 중에 있는 나를 왜 돌아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라고 따져 물어도 속이 풀리지 않는 그런 상황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의 고백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깊은 경지의 고백을 하는 것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이러한 극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를 세 가지 정도로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하고도 신실한 신뢰입니다. 함께 읽으신 본문에 다윗의 고백을 살펴보시면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고백을 하는지 발견할 수가 있는데요.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리고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송축하며 자랑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후의 구절에서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 뒤를 이어서 나오는 내용 들이 바로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광대하십니다. 두려움에서 건지시는 분입니다.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환난에서 건지시는 분입니다. 라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위에서 이 시편을 기록할 당시 다윗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나누지 않았습니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서, 자신의 목숨을 찾는 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옥죄어 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곳 하나 편하게 머리를 대고 누울 그곳조차 없는 내 목숨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은 그런 상황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하고 있던 것이죠.
보통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나요? 하나님이 나를 높은 곳에 세우셨을 때, 무언가 다른 사람이 우러러보는 부러워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곤경에 처하거나 병들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진급이 누락되거나 자녀가 방황하거나 할 때는 오히려 입을 꾹 닫고 하나님을 자랑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이 사실을 알까 두려워하고 감추려 하는 모습을 취할 때가 대부분 아닌가요?
하지만 오늘 다윗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임에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고백에 다윗의 두 가지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는 이러한 상황이지만 이러한 고백을 드림으로써 나를 건지실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미리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죽음을 앞에 두고 있지만 크신 하나님께서 곧 나를 구원하실 거야. 이 두려움과 환난에서 평안과 안식으로 나를 인도하실 거야. 라는 믿음의 고백을 선포하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어떨지라도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감사하는 고백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비록 쫓겨 다니는 상황이지만 아직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였고, 황량한 사막 가운데에서 기거하고 있지만 잠시나마 쉴 수 있는 환경이 있고, 호화로운 식탁을 대접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나마 굶지 않고 어디선가 빵 덩어리를 얻어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라는 고백을 올려드릴 수 있다는 것이죠.
다윗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 고백을 올려드렸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자세를 모두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고백처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과 신앙고백, 두 번째 고백처럼 자족하는 마음의 고백. 이 두 가지 고백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성장해 나가는 믿음의 고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다윗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2절과 6절에 보면 곤고한자 라고 기록된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이들을 빗대어서 말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우리가 가진 개역 성경에서는 곤고하다 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새번역 성경이 조금 더 그 의미를 쉽게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새 번역 성경은 곤고함을 비천하다. 라고 번역하였는데요 원어에서는 이를 가난함으로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얼마나 초라하고 비천한 자인지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내 상황이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나는 지금 힘들고 곤고하고 가난합니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 비천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말하고 있는 뜻은 스스로 낮은 자존감을 가지면서 나는 참 비천한 존재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참 못났어. 나는 끔찍해. 라는 어떤 비관적인 상황으로 나를 몰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순간 다윗이 나는 곤고합니다. 나는 비천한 자입니다. 나는 가난한 자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신앙적으로 마주하고 깨닫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상수훈에서 마태복음 5장 3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부유함은 많은 소유로부터 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이 얼마인지, 내가 보유한 부동산이 얼마인지 주식은 얼마인지, 올랐는지 내렸는지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만족감을 누리고 평안함을 얻습니다.
실제로 제가 가난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자신감도 없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부담스럽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벌면서 지갑에 어느 정도 현금이 있을 때는 뭔가 자신감이 넘치고 누구를 만나도 부담감이 없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깊은 자기 성찰과 본질적인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이 물질적인 부유함이 내 인생의 전부 인양 살아가게 될 때가 많습니다.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인해 희로애락이 결정되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목적과 창조의 이유조차 잃어버린 채 그저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인생이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날마다 상기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이 물질적인 것에 잠식되지 아니하고 선한 양심 안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팔복에 말씀하셨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다윗의 고백과 일맥 하는 내용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오늘의 시편 기자가 고백하고 있는 단어와 의미가 같습니다. 곤고하고, 비천하고,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이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을까요? 제가 저번 달에 설교하면서 잠시 말씀을 드렸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지리적이고 장소 적인 영역이 아니라 통치의 영역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이들, 곧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심 뒤에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대상을 바알이나, 아세라나, 사탄이나, 마귀라고 지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재물입니다.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라이벌이 바로 재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재물이 가진 어떤 능력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물질이 인격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이 물질은 그 물질을 대하는 사람의 인격을 통제하고 그 물질을 섬기도록 만듭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이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심령을 물질이 아닌 하나님으로 채우기를 갈급해 하는 심령이어야만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올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를 원하지만 내 마음이 물질을 향해 있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자신의 곤고함과 비천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의 삶 위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을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이 제목을 아마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은 모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와 저의 윗세대 분들은 이 짧은 캐치프레이즈만 들으시고도 떠오르는 제품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그때 그 추억의 광고 다시 한번 보실까요? // 향수에 젖으시죠? 정말 그래 이맛이야는 엄청난 캐치프레이즈입니다. 그래 이맛이야는 곧 다시다 였으니까 말이죠.
다시다는 정말 마법의 가루입니다. 죽어가는 찌개를 살리고 국을 살리는 것이 바로 이 다시다입니다. 합성조미료 MSG가 몸에 해롭다는 말이 잠깐 돌아서 조미료를 안 먹는 그런 운동도 벌어졌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기도 했죠.
하지만 여전히 밍밍한 국물에 다시다 한 스푼이면 마법처럼 감칠맛이 살아나는 경험을 누구나 하셨을 것이며, 음식을 하다가 뭔가 자신감이 결여될 때 이 다시다의 유혹을 누구나 경험하셨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왜입니까? 넣으면 맛있어지니까요. 깊은 맛이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려 지는 그런 깊고 풍부한 맛을 내는 것을 바로 이 다시다가 해줍니다. 제가 다시다 홍보 모델은 아닌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보이네요.
오늘 본문의 다윗의 고백을 보면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는 다윗의 고백을 만나게 됩니다. 왜 다윗은 여기서 ‘맛보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우리가 다시다의 맛을 잊지 못하듯이, 맛보는 것은 생생한 체험과 경험을 의미합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셨던 그 집밥의 맛을 그리워하듯이,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팔았던 그 떡볶이의 맛을 그리워하듯이, 우리는 맛을 보아 경험한 것은 생생한 기억으로 우리의 뇌리에 저장되어 있고, 그 맛을 다시 먹어보고 만나게 되면 그 향수에 깊이 젖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맛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정서와 그때의 분위기와 추억을 되살리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영상이 하나 또 있는데요. 잠시 보시죠.
감동이 좀 전해지시나요? 이만큼 맛으로 경험된 것은 우리의 삶에 큰 추억과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다윗이 맛보았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윗의 어린 시절을 좀 추억해 보았습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이 성경에 등장하고 골리앗과 싸워 승리하여 많은 사람에게 주목을 받기 이전 다윗은 그저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족 중에 막내로서 형들의 잔심부름이나 하고 심지어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기름을 부을 때 그 자리에 없었는데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아서 사무엘이 찾아서 데려오라 했을 때야 얼굴을 드러냈던 아주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습니다.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수를 만났을 때 다윗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사무엘상 17장 37절인데요.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렇듯 다윗의 삶에 각인된 하나님은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맛보아 경험한 다윗은 지금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도 넉넉히 견뎌낼 힘과 용기가 있었던 것이죠. 다윗의 고백은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 다윗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늘 경험하던 다윗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선포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던 경험이 있나요?
우리의 삶에서 어려움과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찾고 해결하는 방식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인가요? 아니면 이 세상의 재물이나 나의 지혜나 나의 인맥인가요?
오늘 우리는 다윗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었던 세 가지 이유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신뢰와 확신, 그리고 내가 처한 환경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바르게 깨달아 아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서 날마다 그 경험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고난과 어려움이 다가올 때 오늘 함께 나눈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살아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여전히 붙들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그 순간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나를 인도해 가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설령 이 땅 가운데서 고난 중에 내 삶이 끝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치 않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의 모든 눈물을 닦으시고 나를 신원하시고 나를 품에 안아주실 그 사랑의 품과 영원한 나라를 꿈꾸시면서 믿음으로 주어진 삶을 날마다 승리로 이끌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다윗의 고백을 통해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던 다윗의 고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언젠가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셔서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깨닫고 누리게 하신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가 그때를 추억만 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그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날마다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