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사랑하는 두 자녀가 있습니다. 모두 다 아시겠지만 곽소원, 곽진언입니다. 소원이는 첫 돌을 보내자마자 제주도에 내려왔고 진언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마다 특징이 조금씩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이는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아이는 활기찬 성격이기도 하죠. 고집이 있는 아이도 있고 순종적이고 순한 아이도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참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습니다. 두 눈에 장난기가 가득하고 아주 활발하고 나서기 좋아하고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그런 성격이신가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어딘가 닮은 부분은 있겠지만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천방지축이었던 저를 키우시면서 제 고집을 꺾으시기도 하시곤 했지만 저는 제가 가진 천성을 가지고 지금까지 자라온 것 같습니다.
기억이 나는 대로 쭉 제 삶을 돌아보니 아주 어릴 때는 기억이 잘 안 나고요. 초등학생 때부터 학창시절, 청년 시절을 지나 지금 내년에 마흔을 바라보는 불혹의 나이를 맞이하면서 나는 얼마큼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했는가? 하면서 돌아보게 됩니다.
아직 제 마음 깊은 곳에는요. 여전히 천진난만하고 개구쟁이인 성격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가끔 티브이를 보며 나오는 개그맨들을 바라보면서 한때 개그맨의 꿈을 키웠던 저는 내가 저것보다는 더 웃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도 종종 있곤 합니다.
이젠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면서 저희 아이들을 이렇게 보면요. 소원이 진언이가 저를 닮은 아이들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저와 진언이가 생김새도 많이 닮았다고들 하시지만, 저는 잘 모르겠는데 많은 분들이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성격도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소원이가 제 성격을 더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사람을 엄청 따르고 좋아합니다.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활달하고 좀 나쁘게 말하면 너무 개구지고 과장하고 그런 모습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와 좀 다른 점 중의 하나가 소원이는 다른 사람들 타인을 대할 때도 엄청 적극적인 게 저와는 좀 다릅니다. 저도 외향적이긴 한데 제가 한 6~7 정도 된다면 소원이는 10점 만점에 12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부모의 눈으로 보는 것하고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는 것하고 다르잖아요. 그래서 언제 한번은 소원이를 불러서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소원아 소원이가 다른 사람들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달라붙거나 매달리거나 하면 안 돼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싫어해. 라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제 아이도 어느 정도 눈치가 있어서 알거든요. 아빠가 하는 말이 칭찬인지 아니면 훈육인지 압니다. 제가 막 혼내면서 얘기하지는 않았고 이렇게 옆에 같이 누워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소원이가 아빠한테 업히고 아빠 다리에 매달리고 아빠 무릎에 앉고 하는 거 아빠는 다 괜찮아 그런데 그런 건 다른 사람한테는 하면 안 돼. 그건 가족한테만 하는 거야. 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는데요. 소원이가 갑자기 눈을 똥그랗게 뜨더니 왜 안돼요? 다 오라 가족이라면서요. 가족 아니에요? 라고 물어봤습니다.
아 저는 조금 당황했습니다. 그래 가족 맞지 가족 맞는데 좀 뭐랄까. 같이 집에서 사는 가족이랑 또 다른 가족이랄까? 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소원이의 질문에 한동안 할 말을 잃고 곰곰이 생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번에 목사님께서도 큐티에 보내주셨지만, 가족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참된 가족이라고 하셨는데 이 아이는 정말 그렇게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그리고 나는 말로는 가족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상황을 살아가고 있었구나.
저는 소원이의 눈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가족의 의미, 그리고 저의 눈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가족의 의미가 다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각의 차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소원이에게 예절에 대해서 한 번 더 교육을 해주었지만, 소원이가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를 인정하기로 제 생각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아이로 성장할지 어떤 성격과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자라갈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아이가 바라보는 시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요.
저의 시각을 바꾸자 소원이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아이의 가능성과 잠재력들이 기대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한하고 있던 어떤 기준을 넘어서 그 아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상,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자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 될까? 오라 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로 성장하게 될까? 하는 궁금증과 더불어 이 각자의 아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꿈과 소망들이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한 기대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향한 비전을 가지고 계실 텐데 그것을 마음껏 실현할 수 있도록 응원과 격려를 아낌없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나는 아이마다 축복해주고 그 아이들의 성격이 모두 다 다르더라도,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더라도, 내 기준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서론이 길은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누구나 다 아는 말씀이시죠. 바로 단란트를 받은 종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25장에 담긴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24장에는 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25장에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먼저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를 해주시고요. 그다음에 주인과 달란트를 받은 종의 비유. 이후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달란트 비유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다니엘 기도회 때도 박성현 교수님께서 한 달란트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었죠. 내용을 요약하자면, 본인은 한 달란트 받은 것처럼 참 연약한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도우심과 중보하는 이들을 통하여서 다섯 달란트의 은혜가 임했던 것을 깨달았다. 라는 내용으로 기억을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달란트의 비유는 어떤가요? 보통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달란트는 보통 재능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티브이에 나오는 탤런트가 바로 이 달란트의 의미를 담은 파생어이죠.
그렇듯이 우리는 이 달란트 비유를 대할 때 달란트의 많고 적음에 집중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주인이 달란트를 줄 때 차등을 두고 달란트를 종에게 맡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15절에 각각 그 재능대로 한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보기에 아 이 종은 다섯 달란트를 맡겨도 되겠다. 두 달란트를 맡겨도 되겠다 이 종은 한 달란트는 맡겨도 되겠다. 라고 생각하고 차등을 두고 달란트를 맡긴 것이죠.
그런데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정확하게 두 배씩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놓게 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주인이 돌아와 그 종들과 결산을 하게 되죠. 이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칭찬을 받게 되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 받은 달란트도 빼앗기고 쫓겨나게 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죠.
오늘 설교의 제목이 시각차이잖아요. 여기서 몇 가지 단어를 살펴보고 우리의 시각을 전환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달란트의 가치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달란트를 금으로 환산했는데 금 다섯 달란트, 금 두 달란트 금 한 달란트의 가치를 가지고 종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죠.
한 달란트는 금액으로는 3000세겔, 무게로는 35킬로입니다. 제가 설교를 작성한 시점에 금 시세를 확인을 해봤는데요. 금 1g에 6만8천6백22원이었습니다. 시세가 좀 떨어졌더라고요. 제가 금 한 달란트가 몇 킬로라고 말씀드렸었죠? 네 35킬로. 현 시세로 24억이 조금 넘는 돈입니다. 별로 안 놀라시네요?
요즘 하도 부동산이 올라서 1억 2억은 돈도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만 24억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죠. 그리고 내 자녀들이나 가족에게 맡기는 것도 아니고 종에게 이 큰돈을 맡긴다는 것이 성경에서 줬다고 하니까 아~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지 사실 종에게 이런 돈을 맡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48억,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120억 정도 되는 금액을 받긴 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도 결코 적은 금액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노동자가 받게 되는 임금이 1세겔이 4일 치의 노무비였는데요. 노동자의 신분으로서는 32년 동안 매일 같이 일을 하면서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지만 모을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생을 일해서 모아도 모을 수 없는 금액이 한 달란트의 가치였던 것이죠.
그런데 그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바라보면서 옆에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한 달란트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추측입니다.
이게 뭐야 딴 종들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씩 주면서 나는 고작 한 달란트? 이거 차별이네! 차별이야. 내가 쟤들보다 못 한게 뭔데. 자기들이 나보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사람을 차별하고 와 나 자존심 상해. 이런 기분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물론 주인은 그 종들이 가진 재능대로 능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정도면 종이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주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그 종들을 믿고 맡길만한 충성스러움을 보았던 것입니다. 각각의 재능을 따라 누구에게는 더 많이 맡기고 누구에게는 좀 적게 맡겼지만, 그 달란트의 가치는 결코 작은 가치가 아니었던 것이죠.
다시 말하면 주인이 맡긴 달란트의 가치는 이미 그 종을 향한 신뢰, 자신의 믿음대로 의도대로 일해주기를 바랬던 믿음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자신이 받은 엄청난 달란트의 가치는 생각지도 않은 채 다른 종이 더 많은 달란트를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시기하며 주인의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주인은 오랜 시간 떠나 있다가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종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장사하여 두 배의 수익을 남겼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주인의 의도대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긴 시간 동안 뭘 했을까요?
그저 남들이 하는 일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참 열심히도 산다. 너는 좋겠다 다섯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받은 너도 좋겠다 나보다 두 배나 더 있어서. 그렇게 열심히들 일해라. 라고 말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목숨이 붙어있으니 살아지는 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이제 달란트를 맡긴 종들을 불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은 열심히 장사하여서 그간 두 배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주인은 흡족해하면서 그 두 종을 칭찬합니다. 21절 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일에 충성했다고 하십니까?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하십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도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했다고 하셨습니다.
120억은 생각보다 정말 많은 돈 아닙니까? 48억 정도 되는 돈도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아닌가요? 그런데 주인의 입장으로서는 너희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단돈 몇 달란트로 망하거나 부자가 되는 수준의 부자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수준의 거부라는 것이죠.
주인은 달란트의 가치에 연연하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이 종이 정말 충성스러운 종인가? 내가 많은 것을 맡길만한 그러한 성품과 성실함을 갖춘 종인가를 보고 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윤을 남긴 종들은 칭찬과 함께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더 많은 것을 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24절 25절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종은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맡긴 주인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굳은 사람이라는 뜻의 원어를 살펴보면 거칠다 딱딱하다 난폭한 사나운 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사납고 거칠고 난폭한 폭군 아닙니까?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그런 불의하고 무서운 분이 아닙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종의 의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자신은 최소한 한 달란트를 보전이라도 하고 있으면 자신의 안전이 보장될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다른 충실한 종들처럼 받은 달란트를 더 불리지는 못했을지라도 차마 내가 까먹지는 않지 않았으니 자신의 그 게으른 회계보고가 만족스럽게 통과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을 포장하여 당신의 것을 받으소서 라는 말로 무마될 것이라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 게으른 종을 그 책임 전가를 주인에게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난폭하고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아도 거두고, 펼쳐놓지 않아도 모으는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당신을 두려워하였기에 나는 이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묻어두었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것을 받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고 주인은 틀렸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종은 더디 오는 주인이 올 것을 예비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이른 시간에 돌아왔다면 다른 종들도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활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주인은 자리를 비웠으며 그 시간을 통해 다른 종들은 충성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 아닌가? 심지도 않고 키질도 아니 하는 그런 사람이기에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뻔뻔하게 변호하였습니다.
그런 종에게 주인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나요? 26절 27절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뻔뻔하게 오히려 자신보고 악하다고 말하는 그 종을 향해 네가 나를 그렇게 여겼더라면, 내가 악하다고 생각했더라면 너는 마땅히 내 돈을 은행이나 대부업자들에게라도 맡겼다가 원금과 이자를 받아왔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자신은 그런 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을 믿었고 신뢰했기에 그 큰 금액인 26억 원이나 되는 큰 금화 한 달란트를 맡기지 않았겠습니까?
만약에 한 달란트 받은 그 종이 주인이 준 한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하다가 손해가 나고 원금을 손실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고작 한 달란트도 지키지 못했느냐? 라고 하면서 책망하고 쫓아냈을까요? 글쎄요 정답을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그 종이 열심히 노력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쫓아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다시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인이 정말 그 한 달란트 때문에 종을 나무랐을까요? 아닙니다. 주인은 이미 다른 종들을 통해서 이익을 보았습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 달란트 아니 한 열, 스무 달란트 없다고 가난해지거나 파산을 맞을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 주인이 종을 향하여 분노한 것은 그 종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놀라운 신뢰를 받았지만, 종은 자신이 받은 놀라운 신뢰를 무너뜨려 버리고, 오히려 자기보다 많이 받은 다른 종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며 자신을 비관하고 불평하며 주인의 신뢰를 땅에 묻어버린 채 오랜 시간 게으른 삶을 살았던 것. 그리고 돌아온 주인을 향해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채 오히려 주인을 향하여 당신은 악하고 나쁜 사람 아닌가요? 라고 말하는 바로 그 종의 태도에 주인은 분노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는 비교의식에 빠지면 안 됩니다.
나는 왜 하나님이 한 달란트 밖에 안 주셨을까? 그래도 이것이라도 주셨으니 감사하자. 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은 지극히 존귀한 것입니다. 아주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누구도 차등하여 사랑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각 사람 한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도 존귀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 존귀한 자에게 그 분량대로 열매 맺는 삶을 바라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존귀한 자임을 깨닫지 못한 채 다른 누구와 나를 비교하면서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가? 나는 왜 이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라고 자신을 자책하면서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인을 원망하고,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충성과 헌신을 내 팽 겨둔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오늘 본문의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 뜻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31절부터 46절까지의 말씀인데요. 모든 민족을 불러 모아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의인은 오른편에 악인은 왼편에 나누십니다. 그리고선 의인들을 향해 복을 받은 자들아 내가 주릴 때에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었을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아주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제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라고 묻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똑같이 저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라고 묻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재능이 많고, 특별한 특기와 장기가 있고 말을 잘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탁하시고 맡기신 일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 이 일이 우리가 기쁘게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부탁하시고 명령하신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 배로 남기는 것일까요? 무엇을 두 배로 남기는 것을 원하실까요? 헌금을 두 배로 해야 할까요? 전도를 두 배로 해야 할까요? 예배를 두 번 세 번 드려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일이 되어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신 명령. 서로 짐을 지라고 하신 명령.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명령.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명령 등등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구원만 생각하고 이 구원받은 은혜를 땅에 묻어두고선 어떠한 헌신과 충성 열심 없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님 앞에 돌아갔을 때 하나님께선 분명히 우리와 계수할 준비를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맡겨둔 것은 어디 있는가? 라고 물으실 때 저를 구원하여 주신 그 구원 그 놀라운 생명 영원하고 변치 않는 그 가치 땅에 잘 묻어두었다가 이제 가져왔습니다. 라고 말씀하실 건가요?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바라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분명히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베풀어 주신 은혜를 이 땅 가운데서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다 달란트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한 달란트마저도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녀들은 예수님의 보혈만큼의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교할 이유도 없고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더욱 밝히 드러나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남들과 비교하고, 게으르게 인생을 허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존귀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쁨과 감사로 받고 내가 감당해야 할 충성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나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충성스러운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오늘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우리 각 사람이 달란트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만큼 바라보시고 우리를 존귀히 여겨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깨달은 가치만큼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제 교회 건축을 우리 교회 공동체에 맡기셨습니다. 건축하는 과정에서도 기도와 물질로 헌신과 충성을 드리게 하시고 건축 이후에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기대하고 기도하는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모든 믿음의 자녀들이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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