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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by 터틀곽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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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에스라 9 1~15)

 

오늘의 본문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민족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며 애통하는 내용입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행악에 대해서 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행한 행악을 에스라는 가증한 일이라고 고백하였는데요. 그 내용이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여기서 말하는 그들의 딸들은 1절에서 말하는 가나안 사람들 헷사람, 브리스사람, 암몬과 모압 사람 애굽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시고 율법을 주실 때 이러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4 15 1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는데요.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당시 말했던 그 땅의 주민이라 함은 가나안 족속을 포함한 이방 민족이었습니다. 이방 민족과 언약을 세우지 말고 또 그들과 혼인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시대에서 다른 민족과 결혼하는 것이 큰 문제는 되지 않죠.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만들어서 지키게 하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읽었던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하는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나라로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상징성을 띄는 민족이 되는 것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부여된 책무 중 하나는 거룩한 민족임을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이라 함은 경건함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구별입니다. 다른 민족과 구별됨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을 통하여 다른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해야 할 소명이었던 것이죠.

 

 

그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은 작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다른 이방 민족을 선택했을지라도, 그들에게 동일한 율법과 제사장 나라의 직무를 감당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 1절과 2절을 보면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는데 그 일을 행한 이들이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백과 고관들은 백성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승해야 할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불순종의 길을 걷는데에 더 앞장을 섰다는 말씀인 것이죠. 에스라는 그 말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악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이죠. 이후에 에스라의 기도가 5절부터 10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는 민족의 죄악을 깊이 통회하고 자신의 민족을 불러 세우신 때부터 지금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여러 왕들의 손에 넘겨져 칼에 죽고 노략을 당하고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며 그러한 와중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얼마를 남겨두어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살아남은 존재가 되었다. 비록 노예가 되었으나 그중에서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소생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울타리를 베풀어주셨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라고 토로하는 모습이 오늘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죽 나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얼마나 무거운 죄 인지를 깨닫게 하는 고백이 됩니다.

 

작고 연약한 민족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복을 주시고 땅과 자손을 기업으로 주리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범죄 하여 이방인들의 손에 사로잡혀 갔지만 그 와중에서 완전히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얼마를 남겨두어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그들을 귀환하여 다시 하나님의 전을 세우도록 부르셨는데, 그 은혜를 망각하고 또 같은 죄를 반복하는 민족의 죄 앞에 에스라가 통회하고 있는 것이죠.

 

이방 민족과 혼인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포로 된 민족을 억압하고 사로잡아 가서 이스라엘의 처녀들을 마음대로 약탈해 갔기 때문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말씀처럼 방백과 고관들이 이방인과의 결혼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왜 이러한 일을 행했을까요?

 

이방인과의 결혼을 통해 그 땅에서 얻게 되는 유익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 입니다 .예로 부터 다른 민족과의 혼인은 서로를 견제하고, 나라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던 풍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마음의 이면에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기보다 이 세상의 방법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들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지키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니 살 방법을 찾아서 이방인과 화친하고 그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신을 함께 섬겨야겠다는 마음이 그들 안에 자리하게 된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 왕조 이후 급속도로 쇠퇴기를 겪습니다. 요시야와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자 하지만 완전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산당을 남겨두거나 그런 여지들을 남겨두게 됩니다.

 

이후에 주변 이방 나라들에 의해서 계속적인 공격과 압박을 받게 되고, 결국에는 앗수르에 의해, 또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그 땅이 황폐하게 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흐름과 배경에는 늘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민족의 죄악을 깨닫게 하셨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단,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애굽을 의지하고 자신들이 살만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패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었고 포로가 되어 소망이 끊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금 회복시키실 약속을 예레미야를 통해 주셨던 것이죠.

 

이 말씀이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기독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가문과는 혼인시키지 않겠다. 라고 적용해야 할까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이 부분을 조금 더 다루면 좋겠습니다만 그러한 적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은 에스라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시선은 이스라엘 이라는 공동체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늘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부름받은 이들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 모인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고 오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모여있습니다. 공동체는 한 사람의 탁월함과 능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지체로 부름을 받아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다면, 우리는 그 마음을 붙들고 함께 기도하고 회개하고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10장에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함께 크게 통곡하며 모든 무리가 성전 앞에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가 범죄 한 것은 아니지만 에스라는 성전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공동체의 약함을 죄악을 고백하며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공동체를 향한 에스라의 기도를 통해 민족적인 회개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도 에스라 같이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 된 사람들이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니니까 나는 목자가 아니니까 그냥 예전처럼 똑같이 살아도 되겠지? 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으로 살기에 힘쓰고 나아가서 공동체를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 세워질 때 공동체는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 지체의 문제와 연약함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우리 교회가 당면한 건축이라는 큰 문제 앞에서 우리는 하나 된 마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다 연약하고 부족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의 약함을 고백할 때 그 고백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지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이 변하고 회개 하면이 아니라, 내가 변하고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민족을 위해 또 오라 교회 공동체를 위해 또 각 가정을 위해 에스라와 같이 부름을 받은 사람임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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