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 12:23~33)
오늘부터 일주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절기라는 개념이 매년 돌아오게 되죠. 명절이 매년 돌아오는 것처럼 교회력도 그렇게 매년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고난주간도 하나의 절기로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난주간을 마주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부활절을 절기로 맞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때로는 이 절기라고 하는 시기가 신앙생활을 영위해 가는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종 쓰는 단어중에 매너리즘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본래 이 매너리즘 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이후 미술에 관한 문헌에서 쓰이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이 시기에 전개된 미술 기법이 기존의 방식이나 형식을 담습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나아가서 역사적, 비평적 의미가 함축된 복합적인 의미로 문학비평 및 신학에도 통용되는 언어로 확산되었습니다.
매너리즘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틀에 박힌 방식이나 태도에 젖어 그것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것을 두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용어이죠.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이 매너리즘 이라고 하는 것은 미술, 문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광범위 하게 통용되는 언어인데요. 이 매너리즘이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인 이 고난주간을 많은 시간 마주하게 되면서 의례 거처야 하는 교회력의 한 여정으로 매너리즘처럼 여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 고난이 우리의 삶에 흔적으로 남게 하도록 하는 삶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많은 교부들은 억지로 사막에 들어가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 자신을 던짐으로서 그 고난에 동참하고자 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자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견뎌내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고난은 묵상하게는 하지만 그 이외의 또 다른 풍성한 가르침과 깊이로는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형식이 되어버리게끔 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신들만이 영적이고 신령한 의식 안에 있는 존재이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신자 들의 영혼의 상태를 지적하고 불결하다고 여기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띄는 이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고난주간을 마주하면서 이 일주일의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더 알아가며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성장하게 됨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 기도회에 참여하시면서, 우리 각 사람을 위해 또 우리 모든 인류를 위해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는 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 12장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요한복음 12장 23절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죠.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영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낼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고난과 고통과 괴로움의 십자가가 떠오르시나요? 아니면 시상식에 오른 사람의 환희의 찬 얼굴이 생각나시나요?
우리의 삶 깊은 곳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영광의 의미는 보통 후자의 경우입니다.
우리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생애의 가장 찬란한 때를 기억하며 그때를 추억하는 모습을 그리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바로 아래 24절과 2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라고 말씀하시죠.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라고 말씀하시고 바로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의 사명은 무엇인가요?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 밀의 사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음을 당하면 사람들은 그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기 위해서 무덤을 만듭니다.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땅을 파고 그 땅 속에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죠.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밀알의 비유를 들으신 이유는 밀알처럼 자신도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명을 띄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만 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씨앗이 떨어져 땅속에 묻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많은 열매를 맺는 부활을 이루실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영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죠. 영광이 가지고 있는 단어의 의미는 찬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영광의 최종적인 의미를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 얻으실 모든 과정을 통틀어 영광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영광은 화려하지만 그 영광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것은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거쳐야만 하는 것을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25절과 26절의 말씀을 통해 이 영광의 자리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려면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의 소명의식은 자기의 생명을 미워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애착을 가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십자가의 도를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셨던 것이 바로 자기부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인 것이죠. 자기 부인의 삶은 결코 쉬운 선택과 행동은 아닙니다. 이는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는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감당해야할 십자가의 길을 앞에두고 그 잔이 비켜갈 수 있으면 비켜가도록 흐르는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죠.
오늘의 본문 27절에도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예수님께서 이 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하신 기도는 이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를 짐작하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 때를 면하도록 나를 구원하시도록 고백하셨지만, 그 뒤의 말씀은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감당 하셔야 할 고난의 잔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자 28절에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말씀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심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가운데에 현현하신 그 일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이며, 또 다시 영광스러움을 입으시는 것은 십자가를 감당하심으로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영광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찬란하고 높은 곳에서 칭송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손으로 만든 피조물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시기까지 자기를 부인하시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철저히 낮은 곳을 향해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가며, 나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부인하였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내 삶을 통해서 빛으로 영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광과 다른 영광의 빛을 비추는 것.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영광의 길임을 기억하시면서 고난 주일의 첫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곽군의 느릿느릿'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0) | 2022.08.27 |
---|---|
두번째 귀환 (0) | 2022.08.27 |
좌절하게 만드는 방법 (0) | 2022.08.27 |
순탄하지 않은 길 (0) | 2022.08.26 |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 (0) | 2022.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