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 않은 복음
(막 11:15~18)
거리두기가 종료되었다는 소식을 다들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번 주에 2년만에 악수례를 하였죠. 이제 예배당 출입 관련한 인원제한도 사라지고, 가끔씩 주일마다 담당 공무원이 와서 점검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공무원이 와서 우리교회의 예배와 모임에 관련해서 싫은소리를 하거나 패널티를 주지도 않았는데, 괜시리 공무원이 오면 긴장이 되는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얼마전에 민원 문제 때문에 오라 주민센터를 방문했는데 마침 우리 교회를 방문하던 직원에게 업무를 봐야하는 일이 생겨서 괜히 멋쩍은 일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유럽이나 다른 지역들은 거리두기가 벌써 해제 된 곳도 있긴 하지만, 가까운 중국은 상해처럼 큰 도시를 아예 봉쇄해버려서 주민들이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데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쪼록 코로나에 아직 감염이 안되신 분들도 조심하시고, 혹여나 감염되셨다가 회복하신 분들도 면역력과 체력과 몸의 모든 기능들이 완전히 정상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햇수로는 3년째를 맞이했죠. 2020년 겨울에 캄보디아 선교를 막 다녀오면서 시작이 되었으니까요. 햇수로는 3년째입니다. 3년이면 엄청난 시간이죠. 고등학생이었던 은지가 대학을 갔으니까요.
코로나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어떤 것을 꼽으시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몇 가지를 추려보자면 먼저는 손 씻기와 손 소독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손을 엄청 잘 씻어요. 밖에만 나갔다 오면 손을 씻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손 소독제를 쓰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어쨌던 손을 잘 씻습니다. 또 어떤 변화가 있나요? 오프라인 모임이 축소되고 온라인 모임이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어느정도 균형을 이룬 것이 아니라 온라인이 급속도로 커지고 발전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경제적인 부분도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이제 거리두기가 해제 되면서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창궐하지 않는 이상 어느정도 균형이 맞춰질거라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바로 마스크입니다. 모두들 동의하시겠지만 평생 이렇게 열심히 마스크를 쓰고 살았던 적이 있으신가요? 생각하면 처음인 것 같아요. 메르스와 사스 때도 이 정도로 마스크를 쓰진 않았거든요? 저는 이 정도가 아니라 그때는 아예 마스크를 안 쓰고 다녔습니다. 황사가 아주 짙은 날에도 마스크를 안 쓰고 다녔는데 코로나 시절에는 마스크를 안 쓰게 되면 식당조차 갈 수 없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다 마스크를 쓰고 다녔죠. 이제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좀 벗는 사람들이 있긴 하겠지만 실내에서는 그래도 아직은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스크가 익숙해진 시대를 살게 되었죠. 진언이는 마스크를 벗으라고 해도 쓰고 있는게 편하다고 말하기도 하니까요. 그만큼 이 코로나 시대는 우리의 생활을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시 변하는 시대에 발을 맞춰서 우리의 생활을 조정하고 변경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익숙하지 않은 복음입니다. 복음이면 복음이지 익숙한 복음이 있고, 익숙하지 않은 복음이 있나?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본래 복음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복음을 익숙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한자로는 복된소리를 음역한 것이고요. 우리 말로 하면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유앙겔리온 이라고 합니다. 한 번쯤은 들어보셨죠. 이 유앙겔리온 이라는 단어는 로마 황제의 출생이나 전쟁에서의 승리, 황제의 즉위식 때에 사용되던 단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이해하는 의미로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맞습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 나아가서 이런 예수님을 나의 주과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의 핵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셔서 나와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방금 말씀드린 이 복음의 정의가 한글 10포인트로 세 줄로서 정의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소원이 진언이도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렇고 여러분에게도 그렇고 매우 익숙한 복음이죠. 그렇다면 익숙하지 않은 복음은 무엇일까요? 성경에는 생각보다 익숙하지 않은 복음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익숙하지 않은 복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저번 달 저녁 기도회 때 한번 나누었던 말씀이기도 하고요. 많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 바로 성전 정화사건, 혹은 성전 척결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안에서 매매하는자들을 내쫒으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의 분노가 잘 드러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점잖은 목소리로 ‘매매하는 자들은 나가시오! 비둘기와 양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14절 15절에는 같은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였는데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채찍을 만들어서 양도 소도 내쫓고 비둘기는 날려 보내고 상은 엎어버리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은 쏟아버리시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는 이스라엘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원근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그리고 20세가 넘은 남자라면 의무적으로 이 유월절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유월절을 지킬 시기가 다가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이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유대 전역의 유대인들이 몰려든다는 것은 그곳에서 상업적인 일들이 함께 벌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연한 이치 덕분에 유월절을 맞아 성전을 방문하는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숙박업이나, 음식점 등 많은 업종이 활기를 띄었겠죠.
그리고 이 성전 안에서는 공식적인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의 뜰 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제사장의 허락을 받고 물건을 매매하는 곳이 있었는데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이 매매했던 곳이 바로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넓은 장소였습니다. 이곳에서는 매매활동이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요. 이곳을 관장하는 이가 바로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아마 처음의 의도는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먼 곳을 여행하는 여행객들의 편의를 배려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제물을 판매하는 행위를 했었겠죠. 순례자의 불편을 줄여주려는 그 의도는 좋았지만, 문제는 돈이 오고 가는 곳에 이권이 생긴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제사장의 허락을 통해서 성전 안에서 매매가 가능해지자 상인들은 장사할 장소를 얻기 위해서 제사장에게 막대한 자릿세를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더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을 제사장에게 쥐어주어야 했죠. 지금의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자본주의의 악행과 별반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상인들은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제사장에게 막대한 자릿세를 챙겨주고 상인들은 순례객들에게 엄청난 폭리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순례자들은 제물이 없이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기에 막대한 돈을 낼지라도 제물을 구입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정말 온전한 제물이었을까요?
본래 하나님께 드릴 제물에 대해서는 레위기 22장 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괴혈병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너희는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단 위에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그런데 말라기 1장 8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상인들이 판매하는 제물은 다 흠이없고 온전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혹여나 그런 것들이 있다면 엄청 비싼 가격에 먼저 다 팔려버렸겠죠. 순례자들중에 조금 늦게 도착하거나 금액이 부족한 이들은 병든것과 눈 먼 제물을 강매당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기왕 어차피 죽여서 태울 짐승들이라는 생각을 파는자나 사는자나 똑같이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거래를 통해서 구매한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온전한 제사가 되었을까요? 그저 관례적으로 지켜야 하는 유월절 행사이니까 하는 정도의 제사였을 것입니다. 위에 읽은 말라기의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던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도 아니었을 것이며 그들의 마음도 준비된 정결한 마음의 제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상인들에게 막대한 돈을 받아 자기들의 잇속을 챙기는 제사장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이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제사를 집행했을까요?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상대하느라 빨리빨리 대충대충 제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신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월절 행사를 통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예루살렘 인구의 20%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 정화사건을 통해서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시는 행동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자기의 옷을 길가에 펴며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각자의 입장은 달랐겠지마는 그래도 예수님을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 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정치적인 지지층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삶과 생계를 무너뜨리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진리를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익숙하지 않은 진리의 선포로 인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바라보며 환호했던 수많은 사람의 지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유월절 행사는 종교적인 의미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삶이었고 생계였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선포하셨습니까?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기록된바. 라는 말을 하셨는데요. 이 말씀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셨기에 기록된바.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56장 6절 하반부부터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느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56장에 기록된 말씀의 주체는 이방인입니다. 본래 이방인들, 곧 외국인이나 거세된자들은 전적으로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이방인의 제사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내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성전은 내가 기뻐하는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만민의 의미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까지도 모두가 연합하여 하나가 될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유월절은 누구의 절기였습니까? 유대인들의 절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절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자신들을 특별한 능력으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유월절 아닌가요? 그렇기에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이 유월절 행사는 유대인으로 하여금 더욱 그들을 결속시키고 조상대대로부터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립시키는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절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가장 큰 절기의 날 그 중심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오랜 시간동안 관습처럼 행해온 아주 익숙한 시간 속에서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부수는 깨뜨려 버리는 행동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생계였던 매매하는 자들, 환전소를 다 갈아 엎으시며 성전이 어떤 곳인지를 기록된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하여 선포하신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내 집은 성전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만민이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향하여 내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집이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이 성전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 성전관리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맡아서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최고 기관이었고 총 71명으로 구성되어 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등의 계파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기능은 종교적인 일들, 또 도덕적인 일들과 정치적인 일들까지 맡아서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의 행정기능으로는 세금 받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곧 이 산헤드린 공의회는 성전에서의 일을 마음대로 쥐락 펴락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고 장사치들에게 많은 뒷돈을 받고 또 나아가서 로마 정부와의 거래도 담당하면서 로마 정부의 군사적, 정치적인 지원을 받고, 또 성전을 통해 거두어지는 성전세와 세금을 로마에 바치면서 공생 관계에 있었던 것이 이 산헤드린 공의회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대제사장 안나스가 공의회 의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유대인들의 최고 기관으로 성전의 모든 역할과 기능을 감당하고 있던 이들을 향해 너희가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은 바로 예수님이 거하시는 집임을 선포하셨던 것이죠.
성전의 이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향하여 그들을 강도라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행한 이 죄악을 만 천하에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본문 18절에 기록된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그리고 모든 무리가 다 예수님의 교훈을 놀랍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권이 위협을 받게되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악함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이 선포와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 21장 14절에는 이때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만인이라 함은 유대인들, 혹은 외국인들만 포함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시각장애인, 그리고 지체장애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자 그들을 치유하여 주셨다고 기록하고 이씃ㅂ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다섯 구역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가장 바깥쪽은 이방인의 뜰이라는 구역이었고 북쪽을 향하여 그다음에는 여자의 뜰이라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으로 남자의 뜰 혹은 이스라엘의 뜰이라는 구역이 있었고요. 그다음에는 성소라고 불리는 제사장의 뜰이 있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정한 사람이라고 분류된 나병 환자들이나 장애인들은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이 거하던 곳이 바로 성전 미문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곳이었죠. 이들이 치유되자 성전 안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던 것은 이제 부정함이 그치고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선포하시고 제사의 목적과 성전의 의미를 잊은 채 종교적인 행위에만 몰두한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어떤 곳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시각장애인들, 지체장애인들도 마음껏 나올 수 있는 곳이 바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부터 장애인 관련된 협동조합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번 주에는 처음으로 자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장애인들을 4시간 정도 돌보는 활동을 함께 하게 되었는데요. 자폐 장애인과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있어본 적이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강인순 집사님께서 장애인 활동센터에 근무하시고 계신데요. 그곳에도 자폐 장애인들이 많이 올 것입니다.
자폐 장애의 성향이 다 각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소리를 질러요. 어떤 사람은 계속 돌아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조용하게 욕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다 제각각입니다. 도중에 막 과격하게 책상을 두드리고 머리로 두드리고 자해를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데 그 상황을 처음 접하다 보니까 좀 당황을 했어요. 다행이 함께 일하는 직원들중에 경험이 있는 직원들이 있어서 저는 그분들 도와서 열심히 보조하고 밖에 돌아다니는 자폐 장애인을 다시 불러서 자리에 앉아서 활동을 돕고 그런 일을 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는 이 공간에서 그런 자폐장애를 가진 사람이 두 세 사람만 같이 예배를 드린다고 상상해보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까요?
먼저는 불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 이곳에는 비장애인들만 모여 있는 공간이잖아요. 그렇기에 자폐를 가진 사람과 한 공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체 장애까지는 우리가 돕고 섬기고 함께 예배할 수는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지체 장애를 가진 분들도 여기에는 없죠.
예배 도중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돌아다니고,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들것입니다. 아마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저히 예배를 집중해서 드릴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큰 교회에서는 따로 예배를 만들죠. 발달 장애인들, 정신 장애인들만 모여서 예배 드리는 공간과 시간을 구분해서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구분하는 이유는 아마 예배에 비장애인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수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예배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대부분의 작은 교회들은 장애인들이나 장애인의 부모가 출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고요. 또 자격지심 때문에 비장애인들과 함께 있는 공간으로 나오는 것을 꺼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나마 좀 큰 교회에 가면 장애를 가진 분들이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 때문에 그런 곳으로 가게 되거나 특수하게 장애인 사역을 하는 교회를 찾아서 다니게 되죠.
오늘의 설교제목이 익숙하지 않은 복음이잖아요.
우리는 때때로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안정감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진리와 가르침을 펼치시면서 우리를 그 진리 안으로 초청하시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장애인 사역을 시작하거나 고아와 과부를 위한 사역을 시작하자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린 종교적이고 관습적인 생각과 행위가 과연 옳은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성전에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우리가 모인 성전은, 또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서 예수님이 주인이 되신 곳인가요? 아니면 예배의 목적과 성전의 의미를 잊은 채 우리의 마음이 편한 대로 아주 익숙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여전히 익숙한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성전은 예수님이 거하는 집입니다. 저는 이 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은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잖아요. 집이라는 단어는 어떤 건물, 성전 이라는 의미보다 더 가깝고 친밀한 단어입니다. 이 집은 제사장의 것도 아니고, 산헤드린공회원의 것도 아닙니다. 장사꾼들의 것도 아니고 1년에 한번 찾아오는 순례자의 것도 아닙니다. 성전은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만민이 나와 기도하고 예배하는 곳이 예수님의 집인 것이죠.
지치고 상한 영혼들이 찾아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갈 곳 없는 이들이 나와 예수님의 복음과 사랑을 만나는 곳이죠.
만일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소외된 이들에게 찾아가서 ‘교회에 가면 예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라고 전해준다면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현대 시대의 교회가 예수님의 참된 쉼과 사랑과 안식을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을까요?
우리는 익숙한 복음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성전은, 때로는 우리의 불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기록된 성경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금 이땅에서 실현되는 곳이 참된 성전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교회를 개벽하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기존의 것을 다 버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떠나 나의 신앙의 고백과 삶을 통해, 또 우리의 교회의 고백을 통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지, 우리는 변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익숙함을 버리지 않고 새롭게 변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성전을 정화하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오라 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는 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과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며 예배하고 있습니까?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도록 부름 받은 예수님의 제자이고 또 그 목적으로 모인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복음, 불편한 삶 가운데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연약한 이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만납시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주님의 몸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기쁘신 일을 감당하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오전에 함께 불렀던 이 찬양을 한번 더 고백하길 원하는데요. 이 시간 나의맘 받으소서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나의 맘 받으소서 오셔서 주님의 처소 삼으소서 나의 전부이신 주여 내 맘을 받아주소서
나의 맘을 주님께 열었으니 주여 내게 오셔서 내안에 거하여 주옵소서 주가 기뻐하는
주의 성전되게 하소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기억합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의 몸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고 또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기에 힘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고 장애인들을 품으셨던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며, 우리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낮은곳으로 흘러가기를 기뻐하는 우리 삶이 되게 하옵소서. 익숙한 자리에서 떠나 복음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