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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말씀만 하옵소서

by 터틀곽 2022.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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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신 유명한 장면입니다. 오늘은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하는데요.

 

오늘의 본문에서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먼저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등장하시고요. 그리고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또 백부장의 종이 등장하고요. 유대인의 장로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벗들이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이 장면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백부장이죠. 여기서 말하는 백부장은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을 의미합니다. 십부장은 보통 열명 정도를 백부장은 백여명을 통솔하는 위치의 지휘관입니다. 이 백부장의 종이 병이 들었는데 죽게 되었다. 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아주 심각한 병에 걸려있음을 알 수 있죠.

 

중요한 것은 당시 백부장의 출신인데요. 아마 이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닌 것으로 성경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아마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들이 여러 곳곳에 많은 소문으로 들려진 것 같습니다. 백부장도 이 소식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요. 그 소식을 들을 이 후에 유대인 중에 장로들을 택하여 예수님께 보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 유대민족은 로마의 속국이었기도 하였고, 당시 왕정으로 통치되긴 하였지만 군부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군인들이 가진 힘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중 영향력이 있는 장로들을 택하여 예수께 보내어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볼 수가 있죠.

 

하지만 당시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이방민족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는 늘 갈등관계에 있었고, 유대인들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인들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를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하는 열심당원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과는 늘 갈등관계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백부장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백부장이 유대인중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보내었다고 하는데, 백부장이 자신의 권위와 명령으로 그들을 보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장로들은 4절과 5절에서 이렇게 예수님께 구합니다.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이 백부장이 어떤 이유로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또 그들을 위하여 회당을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백부장의 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예수께 나아가 이 백부장을 높이 평가 하면서 이 백부장의 청을 들어달라고 예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회당을 지어주고, 호의적인 마음을 베풀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유대인들에 대한 좋은 인식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한가지 미루어 추측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백부장이 베풀었던 선한 일들로 인해서 유대인의 장로들의 마음이 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깊은 선민사상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우월감이나 선민사상은 유대인들의 자긍심으로서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중대한 가치였습니다. 그렇기에 수차례 포로기를 거치고 외세의 침략과 압제속에서도 메시아 사상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고 언젠가는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 약속의 말씀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땅은, 유대민족들은 찬란한 영광의 시대를 다시 되찾아 올것이라는 그 믿음이 굳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의 정권을 좋게 바라볼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 정권에 깊이 개입한 사람들 또한 좋아하지 않았겠죠. 하지만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이 이방인의 간청에 발벗고 나서서 이 이방인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백부장이 유대민족과 그들의 신앙에 얼마나 가까이 있었으며 얼마나 호의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회당도 지어주고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이 백부장의 언행을 증거해주는 것이죠.

 

이 말씀을 통해 한가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유익한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쟁 구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경쟁하면서 성장하고, 이 세상에 내던져 지는 순간 끊임없는 경쟁을 치러야 합니다. 입시전쟁, 입사전쟁, 결혼전쟁, 모든 것이 경쟁과 전쟁입니다.

 

하지만 이 끊임없는 경쟁은 우리의 인간성을 피폐하게 만들고, 비교의식과 패배의식을 만듭니다. 여유를 없애버리고 계속적인 긴장감 안에서 살아가게 하고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들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면 되도록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 안에서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 백부장이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백부장이 쌓아놓은 이 신뢰의 관계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좋은 호감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권력을 가지게 되면 오히려 내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하대하거나 막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후에 등장하는 성경 구절에서도 이 백부장의 마음 상태와 자세를 보여줍니다.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죠.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으로 들어가시려고 하자 백부장이 먼저 자신의 벗들을 보냅니다. 백부장의 친구들이라면 같은 백부장이던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위치를 가진 사람들이었겠죠. 아마 어느정도의 권력과 위치를 가진 친구들을 먼저 보내어 자신의 집에 오는 수고를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자신이 직접 나아가서 예수님께 자신의 언어로 전달해도 될 것인데 굳이 친구들을 보내어 그 수고를 감당하게 합니다. 이는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이라는 존재 앞에서 행동거지를 조심하려고 하고 겸손의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에 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당시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소문을 들은것만으로도 이만한 존경심과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참 의아한 일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유대인이었고, 자신은 로마인이면서도 어떤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러한 위치에 있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겸손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7절엔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라는 고백을 합니다. 오히려 벗들을 보낸 이유는 나 자신 조차도 예수님을 보기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내 하인을 낫게 해 주십시오. 다른 사본에는 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라는 믿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겸손의 끝판왕이라고도 불릴만한 믿음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 나아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실제로 안수를 받아서 병고치는 사람도 많은데 이 백부장은 자신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저 그 자리에서 말씀만 하시면 내 종이 나을 줄로 믿습니다. 라는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크게 놀라십니다.

 

9절에 기록되어 있죠.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님도 놀랍게 여기시면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방인의 믿음이 정말 크고 놀랍다. 나는 이스라엘에 사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너희들중에서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리고 백부장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보니, 그 종의 병이 나아 있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주는 것 같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께 칭찬받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께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이 이러한 믿음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로 백부장이 가지고 있던 성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이나 위치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압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연약한 이들을 돕는 선한 마음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을 위한 간청이 아닌 자신의 종, 하인의 질병을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습 또한 이 백부장이 가진 성품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나타냅니다. 당시에 종이라는 개념은 인격으로 대해지는 것이 아닐 물건처럼 여겨지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그러한 종에게 까지도 연민의 감정을 가졌으며, 이 종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간청하는 그런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그의 믿음과 신뢰는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믿음이며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그렇게 신뢰할 수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침의 소문을 들은 그는 이 예수님이 참 메시아 이심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이 백부장의 겸손과 함께 아마 유대인들이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도 합니다만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하여 주로 고백하면서 겸손하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종을 고치실 것이라는, 그것도 한마디 말씀이면 가능할 것이라는 참된 믿음을 이방인으로서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축복을 경험하는 확실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내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겸손을 행하는 참 겸손의 사람이 되는 것, 두 번째는 전심으로 예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무가치함을 고백함과 동시에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예수님을 놓지 않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내가 살아가는 사회와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나는 겸손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인가요?

 

질문2.

나의 믿음은 내가 만족하는 믿음인가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인가요? 나의 믿음은 예수님을 참된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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