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우물과 인생
(창 26:13~22)
이삭의 여정을 보면 아브라함과 매우 닮아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어제 강성미 전도사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이 평행이론 같다고 표현을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녀를 낳지 못했던 부분도 그렇고요. 어제의 본문에서도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했던 그 실수도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죠. 아브라함이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을 이삭에게 들려주었는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삭은 아버지의 실수를 그대로 담습합니다.
사라도 그렇고요, 리브가도 그렇고요 당대의 빼어난 미녀였었는지 확실한 어떤 증거는 없지만 정경이 아닌 다른 사본들에 의하면 사라가 나타났을 때, 주변에 있는 여인들이 모두 원숭이처럼 변했다. 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아내가 예쁘면 남성들이 긴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오라교회에는 긴장해야 할 남성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과 같은 내용이 창세기 20장에 기록되어있죠. 아브라함이 블레셋 땅에 거할 때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사라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아비멜렉이 많은 돈을 주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돌려 보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이삭이 또 아비멜렉의 동네에서 리브가를 누이라고 했다가, 둘이 함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아비멜렉이 목격하고서는 왜 그렇게 하였냐고 이삭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제가 아비멜렉이었으면 혹시 너희 아버지 성함이 아브라함 아니니? 라고 물어봤을 것 같아요. 어쩜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닮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몇몇 분들이 저랑 진언이랑 닮았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는 이 정도는 아니거든요.
아무튼 이 사건이 있은 이후에, 12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거부가 된 이삭의 모습이 아브라함과 닮아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재물이 많아짐으로 인하여 그들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주어 그가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본문 13절과 1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리고 이삭 또한 아브라함과 비슷한 행보를 보여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롯에게 결정권을 양보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수도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물을 얻는 방법은 물이 흐르는 강가 주변에서 정착해서 살거나, 아니면 유목민들은 이동하는 동안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아 아브라함도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람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물의 근원을 구하는 것은 생존과 연결된 아주 중요한 일중 하나였습니다.
이삭이 그랄 지역에 거하면서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는 것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우물을 누가 팠으며 당시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 우물의 소유가 누구의 것인지도 아마 알고 있었겠죠. 하지만 아브라함이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간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워놓았기 때문에 이삭은 다시 그 우물을 파고 그 지역에 기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우물을 파자 그랄에 거주하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면서 이 우물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말도 안되는 주장이죠. 원래의 소유가 아브라함이었고, 또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워 놓았기 때문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던 우물이었습니다.
이삭은 다시 수고하여 그 우물을 팠고 이제 그 우물을 사용하고자 하였던것 뿐인데, 이삭을 시기하던 그랄의 목자들이 그 우물이 자신이 기거하는 땅에 있었으니 원래 자기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상식대로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우물의 소유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확인시키고 또 오랜시간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내용증명을 받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미 이삭도 거부가 되었고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이용해서 그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하지만 이삭은 어떻게 하나요?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다른 우물을 파죠. 그런데 또 이삭을 시기하던 이들이 와서 또 훼방을 놓습니다. 보통 우리가 한번은 참을 수 있는데요. 두 번을 참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미 억울하게 나의 소유를 빼앗겼던 상황이었고, 물을 얻지 못하면 생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 우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무 땅이나 판다고 다 우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죠. 제가 우물을 파본 기억은 없지만 이삭은 아마 그 우물을 얻기 위해서 오랜 시간 동안 수고하고 땀을 흘렸었을 수도 있습니다. 군인들은 군대에 가서 한 번쯤은 땅을 팝니다. 주특기가 달라도 한번도 삽질을 안하는 군인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들어가 몸을 숨길만한 1미터의 땅을 파는데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사실을 아시나요? 생각보다 땅을 파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군인들은 철로 된 삽과 곡갱이라도 가지고 땅을 파니 그 정도가 걸리는 것이고요. 이삭의 때에 물을 얻기 위해서 깊이 땅을 파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수고를 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우물을 파서 물을 얻은 기쁨도 잠시 또 다시 자신들과 다투려고 나아오는 이들로 인하여 또 우물을 내어줍니다. 이삭은 자신의 오랜 수고의 결실을 내버려두고 그들과 다투려고 하지 아니하고 또 그 자리를 피하여 새로운 우물을 파는 모습을 보여주고 잇습니다.
세 번째로 판 우물의 이름이 르호봇입니다. 이제 그곳에서 우물을 판 이후에 다툼이 그쳤다고 22절에 기록이 되어있죠.
그리고 이삭은 이러한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라는 인물의 여정은 사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거의 마무리가 됩니다. 이후에 야곱이 에서가 사냥하러 간 사이에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가서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이 등장하죠. 이 스토리에서도 이삭은 친 자식의 목소리와 형태도 구분하지 못하는 노쇠한 노인으로 등장하고 그 시점부터 야곱의 인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첫 번째 사람이고요. 야곱은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어 열두 아들을 낳고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 되는 그러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뭔가 그럴싸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아브라함의 후광을 다 덮지 못하는, 그저 아브라함이 행했던 사건들을 똑같이 담습하다가 그의 인생이 끝나는 것만 같은 그런 인물입니다. 이삭이 이삭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이며, 야곱의 아버지이기 때문인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이삭이 행하였던 일을 통해서 이삭같은 사람이 우리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 정말 본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삭의 여정은 뚜렷한 업적이나 큰 믿음의 도전이나 어떤 하나님과의 깊고 깊은 사귐이나 이러한 것이 별로 없는 무채색 같은 인생이었습니다만 이러한 인생이 우리네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살아가면서 큰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신앙과 정신을 많이 듣고 배웁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분들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평범하고, 어떤 큰 믿음의 시련이나 도전이 없을 수도 있고, 때때로는 너무나 초라하고 나약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끔씩 하나님 왜 저는 이 정도 밖에 안될까요? 왜 저는 이렇게 믿음이 부족할까요? 라는 기도를 드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극히 평범한 인생 속에서 실수와 넘어짐을 반복하며 살아가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여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기록된 이삭의 모습을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우물 사건을 통해서 이삭의 삶을 전부 해석할 수는 없지만 오늘의 사건은 이삭의 삶의 태도가 어떠하였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삭은 자신이 당한 억울함 앞에서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그랄의 목자들과 다투거나 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수고하여 얻은 것들을 빼앗고자 하는 이들과 분쟁하려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리로, 또 새로운 자리로 옮겨가는 이삭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삭이 소심해서 싸울줄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그랄의 목자들이 무서워서 그랬을까요?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삭은 자신이 정말 수고하여 파 놓은 우물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갔을까요?
사실 정확한 이유를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삶의 자세를 통해 우리는 영적인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을 가르쳐 주신 것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과,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대라는 말씀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을 주라는 말씀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그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한 이삭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이삭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의 인생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인생은 아니었지만, 누구나 쉽게 살아갈 수 없는 그러한 인생의 여정을 이삭이 살아갔음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삭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 22절의 이삭의 고백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를 원하는데요.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나의 오랜 수고로 얻은 귀하디 귀한 생명과도 연결된 우물을 포기하고 두 번이나 자리를 옮겨 세 번째 주신 그 우물을 앞에 두고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고백하는 이 믿음의 고백은 정말 쉽게 올려드릴 수 없는 고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내가 정말 오랜시간 수고해서 얻은 우물인데 이것을 포기하라고요?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포기하라는건 좀 너무하지 않으신가요? 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에서 쓰디 쓴 실패를 경험할 때, 또 나의 수고로 세워진 공든 탑을 누군가가 빼앗아 갈 때 오늘 이삭의 고백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이 정말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신앙생활은 과연 무엇입니까? 한번 스스로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실제적인 믿음의 고백과 행동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 것처럼 두 번의 실패 그것도 스스로 실패한 것이 아니라 나를 시기하는 이들의 억지스러운 욕심과 탐욕으로 나를 공격하는 그 억울한 공격으로 인하여 그 땅을 떠나야 했던 일. 하지만 그 이후에 세 번째에야 베풀어 주신 그 우물 앞에서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 라고 고백하였던 이삭의 이 고백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여정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실현되어져 가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발견해 나아가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찬양을 고백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 이삭의 삶의 여정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한 부분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 때로는 평범하거나 연약하거나, 실수가 많더라도, 반짝 반짝 빛나지 않더라도, 화려하지 않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삶의 한절이라도 주님을 닮기 원하는 그것을 소망하는 삶이 되어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길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