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의 족보
(창 38:1~11)
창세기 37장부터 요셉의 스토리가 시작이 되죠.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38장에서는 갑자기 유다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유다의 후손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가 기록된 장이 38장입니다.
제가 화요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족장사의 기록이 언약중심으로 기록되었다면 야곱 이후에 요셉이 아니라 바로 유다가 나왔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었죠. 하지만 유다보다는 먼저 요셉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오늘 38장의 본문으로 유다의 후손에 대한 전승이 기록이 됩니다. 그리고나서 39장에서는 요셉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중간에 유다의 족보 이야기를 끼워놓은 이유는 창세기에서 시작된 족장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언약의 기둥이 있는데요. 하나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정착하게 되지만 그 중간에 유다의 족보를 추가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언약이 유다를 통하여서 계승되고 있음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역사의 흐름, 그리고 역사의 배경은 순리적이고 조화롭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역사의 배경은 본래 장자를 통해서 가문의 전통과 유업을 물려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고대 문화 뿐 아니라 서방 동방 할 것 없이 장자에게 모든 것이 위임되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드러난 역사의 흐름은 그 시대의 배경을 꼭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 배경을 아예 무시하고 있지도 않고 있죠.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직 자녀가 없는 노년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리고 자녀가 없었던 아브라함은 그 언약을 이을 자로 처음엔 롯을 데려갔다가, 문제가 생기게 되자 엘리에셀을 세우고, 또 그것마저 여의치 않자 자신의 씨를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습니그렇기에 본래 장자의 권리는 이스마엘에게 있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인 이삭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낳죠. 장자의 권리는 에서에게 있었죠. 에서가 배고픈 나머지 팥죽 한그릇에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리지만, 이 권리가 팔아진다고 팔아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팥죽 한 그릇으로 어찌 될만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삭도 야곱이 아닌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과 권리를 주기 위해서 에서를 몰래 불러 축복을 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축복을 야곱이 대신 받아서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야곱은 열 두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중에서 장자는 레아를 통해서 낳은 첫 번째 아들인 르우벤입니다. 역사적인 배경과 혈통으로서는 르우벤이 그 권리를 이어받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르우벤은 혈통으로서는 장자였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는 유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장자에 대한 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역사적인 배경인 것과 또 성경에서도 야곱이 장자의 권리를 간절히 원했던 것을 보아서 장자가 갖는 권리에 대해서도 성경이 묵과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게되죠. 그런데 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이들은 장자가 아닌 이들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첫째가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자였던 르우벤은 창세기 35장 22절에 보면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첩인 빌하와 동침하여 야곱이 그 사실을 알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창세기 49장에도 보면 야곱의 유언에 르우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이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서도 자신의 장자권을 소홀하게 여겼고, 이방여인인 헷사람을 부인으로 삼는 행동을 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꼭 장자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지 못했다. 라고 여기기도 좀 시원치가 않습니다. 오늘 유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느껴질 수 있는데요.
유다는 야곱의 뒤를 이어 영적인 계보를 이어나가는 인물이 됩니다. 유다는 레아를 통해서 낳은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이었죠. 어떤 연고로 유다를 통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이 족보가 내려갔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는 하나님의 예언적인 개입이 분명히 있으셨음을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삭은 사라를 통하여 낳은 자식으로 그 기업을 이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고 야곱에 대해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개입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그와 같은 말씀은 따로 없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유다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습니다. 첫째는 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고요. 그리고 둘째는 오난 이라고 하는 자녀를 낳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맏아들인 엘을 장가보내게 하기 위해서 다말이라는 여인을 데려와 혼인을 시키는데요. 38장은 유다의 족보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사실은 다말이라는 여인이 이 문맥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둘째인 오난에게 말하여서 너의 형수를 위해서 네 형을 위해서 기업을 대신 이으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둘째인 오난은 그렇게 형을 위해서 기업을 이어도 그 기업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다말과 동침하여도 임신이 되지 않게끔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악하다 하시고 오난도 죽이십니다.
오난이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형수인 다말과 동침하여 자녀를 낳게 되면 그 자녀가 아버지의 유다의 기업을 물려받을 장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자신이 그 기업을 이어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형수를 통해서 자녀가 생산되지 아니하도록 그런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죠.
형제간에 자녀를 낳게 하여서 대를 잇는 다는게 현대사회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만한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으실겁니다만 당시 문화에서는 형제간에 이렇게 누군가 죽임을 당한다던지, 어떤 연고로든 자녀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후손을 이어갈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엄청난 비극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가 혈통과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대신 그 기업을 이을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 일반적인 문화였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자신의 자손을 통해서 곧 자신의 씨를 통해 낳은 자손들을 통해서 자신이 계속해서 살아간다고 믿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혈통이 끊어진다는 것, 곧 후손을 더이상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아주 큰 사건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서는 위와 같은 일을 ‘기업 무를 자‘ 라고 하여 형제를 대신하여 보수할 자 형제의 억울함을 회복할 자 라는 명목을 가지고 반드시 그 기업을 이어가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고엘 이라고 칭하는데요. 이 제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지파는 기업으로 받은 땅을 보존해야 했으며, 혈족을 유지하며 또 공동체 내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대신 보상을 받아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엘이 죽자 고엘 제도 안에서 다말에게 오난을 보낸 것인데 오난이 이를 거부한 것이죠.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여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첫째와 둘째가 다 죽임을 당하자 막내인 셀라도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아예 다말에게 수절을 명하고 셀라를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다음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다말이 창녀로 변장을 하여 시아버지인 유다와 관계를 맺고 그로 인해서 베레스와 셀라를 출산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다시금 아브라함의 계보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하나님께서는 사회적 통념과 역사적인 배경을 뛰어넘어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임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장자에 대한 축복과 기업을 이어주는 것이 사회적 통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장자에 대한 축복과 기업을 이어주는 것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그의 후손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때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따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임을 보게 됩니다.
이는 요한복음 1장 13절의 말씀으로 뒷받침 할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라는 이 말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배경과 전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이 뜻하신 바를 성취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연약한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가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다와 그의 자녀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엘도 하나님 앞에 범죄했으며 오난도 형의 기업을 잇지 아니하기 위해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엘의 본분을 다 하지 않았기에 그것을 악이라 하셨습니다.
오난의 죄는 자신이 기업을 잇고자 하는 탐심에 사로잡혀 연약한 이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야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했기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다 또한 홀로 된 다말을 더 세심하게 돌보아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난을 통해 기업을 잇도록 명하였지만 오난이 범죄한 사실에 대해서 다말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오난이 죽자 오히려 다말을 수절시키고 친정으로 돌려보내 수치를 당하게 하였습니다.
유다가 다말을 위했더라면 다말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었거나, 다른 방법으로 그녀를 도왔어야 했을 것인데, 오히려 다말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말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말이 비록 엘에게도 버림받고 오난에게도 버림받고 유다에게도 버림을 받았지만, 그녀는 유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기업을 이어갑니다.
다말이 한 일 자체가 의로운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죠. 하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섭리를 이루어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 라고 해서 족보가 한번 더 등장하는데요. 이 족보에는 특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 아버지와 아들의 대를 이은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특별하게 여인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절에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는 구절, 5절에서는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다는 구절, 6절에서는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말하고 있죠 그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구절, 그리고 16절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죠. 다말과, 라합과, 밧세바와 마리아입니다. 왜 이 네 명의 여인들만 등장했을까요? 사실 이 족보를 더욱 일관성 있게 기록하려면 여인들에 대한 내용은 싹 빼던지, 아니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부터 모든 여인을 넣던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 네명의 여인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드러내기에 조금은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시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다말, 그리고 이방 여인이면서 기생이었던 라합, 다윗이 간통하기 위하여 남편을 죽이고 빼앗은 밧세바, 그리고 남편과 혼인하지 않았지만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와 같은 여인들이 오히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의도하는 바가 분명히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지혜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방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눈 앞에 있는 현재와 그리고 지나온 과거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초로부터 마지막 종말까지를 섭리하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역사 안에서 가장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 또는 죄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다말을 향해서, 라합을 향해서, 또 밧세바를 향해서 그들을 옳게 여기고 그들의 삶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오히려 시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여자라고 해서 그녀를 핍박했을 것이며, 라합도 목숨은 구원 받았지만 이방여인이었던 사실과 기생이었던 과거로 인해서 유대민족 안에서 좋은 시각으로 비춰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야로부터 빼앗은 밧세바도 남편을 죽음으로 내몰리게 한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는 오명이 벗겨지지 않았었겠죠. 마리아 또한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남편 요셉과 혼인전에 아이를 낳았다는 그 누명같은 사실이 죽을 때까지 벗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계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에서는 밝히 드러내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넘어서 할 수 있는대로 선한 일을 행하며,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기보다는 선한 역사를 써나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상처가 있고 과거의 아픔이 있는 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그들을 통해서도 일하시고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또한 죄악 가운데 살았지만 크신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성숙하고 숭고한 고백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다말이 자신의 시아버지인 유다를 통해서라도 자녀를 낳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유다는 그런 일을 한 다말을 왜 옳다고 여겼을까요?
질문2.
우리가 가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넘어선 성경의 기록들을 마주할 때 받게 되는 느낌은 어떠신가요?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대할 때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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