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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아벨성 여인의 지혜

by 터틀곽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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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지혜

(사무엘하 20:14~26)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왕궁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다윗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이스라엘과 유다의 감정의 골이 봉합되지는 않은 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초대왕 사울은 이스라엘 중 베냐민 지파였고, 다윗은 유다지파였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이 초대왕으로 뽑힌 그 상징성을 더욱 의지하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민족의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이니,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로 왕이 된 다윗은 용맹스럽고 사랑스러웠으며 밧세바를 취하기 전까진 왕으로서의 신임을 받았지만, 그도 범죄 하여 하나님께 심판을 받게 되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자 신세가 된 이후에는 백성들의 신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므이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도 베냐민 사람이었고 비그리의 아들 이름은 세바였습니다. 그가 다윗이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팔을 불면서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아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가자. 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세바를 따르기 시작했죠.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다윗이 환궁하는 길에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간에 갈등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갈등의 이유는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족속 사람들이 왕을 향해서 왜 유다 사람들만 왕을 차지하게 하십니까? 라고 서운함을 내비쳤던 것이죠.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당연히 다윗왕은 우리 지파 사람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질책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은 우리가 왕을 모셔오기로 하였는데 너희만 왜 공을 차지하는가 라고 하면서 유다지파를 또 나무라죠. 하지만 유다 사람의 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보다 더욱 강경하였다고 말하면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의 요점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사람이든 유다 사람이든 왕이라는 권력자 옆에 붙어 있으면서 무언가 한 자리를 받아먹으려는 그 생각에 가득 차 있던 것이죠. 그러던 도중 기분이 상한 세바가 왕을 조롱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동시켜서 각기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 것이죠.

 

다윗을 왕으로 추대할 때는 언제고, 기분이 상하자 다시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를 보면,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바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베냐민 지파 사람들 중심으로 힘을 모으면서 다윗을 밀어내는 이유도 사울의 정통성을 이으려고 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그런 세바를 다윗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6절에 보면 다윗은 아비새에게 일러서 세바가 압살롬보다 더욱 골칫거리가 될 것 같으니 그를 쫓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비새와 요압은 세바를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바가 숨어있는 성에 이르자 그 옆에 토성을 쌓고 그 성을 함락시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토성을 쌓는 것은 공성전을 하기 위함인데 공성전의 전쟁은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의 피해도 많은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목숨이 걸린 일이라 방어하는 쪽도, 그리고 공격하는 쪽도 사활을 걸고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보다는 유다지파에 속한 군인들이 훨씬 전쟁에서는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성에 있던 한 여인이 등장하는데요. 성경에서는 그 여인을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전쟁의 자리에서 여인이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입니다. 보통 전쟁은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목숨이 걸린, 어찌보면 잔혹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여성이 일어나 요압을 가까이 오라고 요청합니다.

 

고대 역사는 남성 중심의 관점으로 기록되어졌고, 더군다나 전쟁은 더욱 남성 중심의 산물인데 이 여인은 지금은 적군으로 서 있는 사령관인 요압 장군을 불러렀던 것이죠. 그런데 요압이 이 여인의 요청에 응하여 그 여인을 만나러 앞으로 나아갑니다. 만약에 요압이 이런 전쟁터에 어찌 여인이 나서서 무엇하려는가? 라고 생각하고 그 요청에 응하지 않고 그대로 진격하였다면 전쟁의 끝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던 요압도 그 여인의 요청에 의하여 앞으로 나가 여인의 말을 듣고자 했던 것이죠.

 

그 여인은 요압을 향하여 옛 속담을 말하며 이 성읍은 지혜로운 성읍이며 이스라엘의 어머니와 같은 성읍인데 어찌하여 이 땅을 멸망시키려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요압이 그렇지 아니하다. 나는 반역자를 잡으러 온 것 뿐이다. 만약 이 반역자만 내어준다면 나는 이 성읍에서 물러갈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주민에게 돌아가서 그 지역 주민을 설득시키고 세바의 머리를 베어서 요압에게 던져주죠. 머리를 받은 요압은 약속대로 그 성읍에서 떠나갑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두 사람의 용기와 반응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먼저는 지혜로운 여인의 용기입니다. 자신의 위치와 연약함에 상관없이 요압을 향해 섰던 여인의 용기를 우리는 본 받아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그렇고요. 인류 역사에도 용감한 여인들의 일대기를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도 그렇고요. 이 여인들의 용기는 한 민족을 살리는 위대한 용기와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압니다. 자기의 주제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철학자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을 통해서도 자기 분수를 알고 주제를 아는 것을 인간 됨의 도리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죠. 실제로도 내가 나의 주제와 분수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나서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으로 인해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러한 분수와 주제를 벗어던지고 돌파해야 하는 때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과 같은 때이죠. 내 분수를 알아야지 어찌 감히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중차대한 일에 함부로 나서면 되겠어. 남들이 알아서 하겠지. 어떤 다른 힘 있는 사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도 없었던 그 여인은 그 전쟁의 자리에 나가서 자신의 연약함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용기 있게 그 자리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여인이라는 위치는 사실 그렇게 인정받을만한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억압받았던 위치이기도 하죠. 하지만 당시 아벨 성에 있는 여인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위치와 한계를 뛰어넘어 요압을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있던 여인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못해요. 나는 어려서 못해요. 나는 나이가 많아서 못해요. 나는 입술이 둔해서 못해요. 등등 할 수 없는 이유와 조건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 혹은 그것을 뛰어넘어 성령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의지하여 소명의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물러서야 할 때는 겸손하게 물러서지만, 감당해야 할 때는 겸허하게 그 일을 감당해내는 사명자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는 요압의 자세입니다. 요압 정도 되면 누가 부른다고 가고 오라고 해서 오고 가는 입장이 아닙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 정도 되는 다윗의 바로 다음 서열을 가진 인물이 바로 요압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쟁 중에 여인의 부름 앞에 응하였다는 것은 요압도 그저 그런 인물이 아니라 중요한 상황을 판단할 줄 알고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이죠.

 

죄송한 말씀으로 제가 여기서 제일 젊지만, 우리가 나이가 들게 되면 고집이라는 것이 생기더라고요. 그 고집은 나의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내가 다 경험해봤어. 그땐 다 이렇게 했어. 그렇게 하면 안돼. 라는 식으로 내가 경험했던 어떤 부분을 전체화 시키고 절대화 시키는 것이 고집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고집스러워지면 소통을 할 수가 없죠. 소통이 안 되면 발전도 없고 변화도 없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요압은 정말 많은 전쟁에서의 경험과, 또 자기가 가진 위치를 이용해서 다른 이들의 말을 얼마든지 업신여기고 억누를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 여인의 요청에 응답하고 그녀의 지혜에 반응함으로 인해 적군과 아군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게 된 인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겸손의 자세는 그가 속한 공동체를 살리게도 만드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겸손하게, 그리고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이 되어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 혹은 연소하거나 연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처럼 내가 용기를 내어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내 주변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질문2.

요압처럼 내가 겸손하게 들어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나요? 아니면 나의 경험과 판단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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