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가는 등불 끄지않는
(삼하 21:15~22)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인생의 진리이고 섭리지만 그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때면 무언가 마음이 무겁고 약간 우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기력이 쇠하는 것,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 것 등을 통해서 아 내가 나이가 들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삶을 정돈하고 마지막 삶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한 분 계세요. 혹시 여러분도 아시는 분 이실수도 있는데요. 실명을 거론하기는 좀 그래서요. 그분이 명퇴를 하셨는데 아직 집에는 말씀을 못 드리신 분이 계세요. 프라이버시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실명을 말씀드리진 않겠어요. 제가 그분을 종종 뵙는데요. 어제도 뵙고 그제도 뵙고 아무튼 종종 뵙습니다. 그러면 이제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하시고 그러시더라고요. 아무쪼록 잘 준비하시기를 중보 하고 기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분을 만나면 저도 저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분과 대화를 하다가 저는 은퇴를 하면 라면집을 하고 싶어요.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의 꿈이기도 해요. 그래서 은퇴를 하면 작은 가게를 하나 얻어서 한 켠에는 라면만 파는 작은 라면집을 하고 다른 한 켠에는 서적을 파는 서점을 같이 하고 싶어요. 그래서 기력과 에너지가 막 젊은 시절만큼 충천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라면집을 하면서 살고 싶다. 라면은 내가 끓이고 아내는 카운터를 맡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제가 라면집을 차리면 꼭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상하게도 한국만의 정서인지, 다른 나라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은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무언가 삶이 저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의 쓸모는 여기까지인가? 나는 더이상 꿈을 꿀 수 없는 건가? 라는 느낌을 주는 것도 같습니다. 물론 이제야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정년퇴직을 하여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 온 만큼 남아있어 버려서 이제는 60이 넘어도 청년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기대수명이 80세 정도일 때는 이제 정년퇴직을 하면 무언가 어떤 일에 도전하거나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삶을 정돈하고 마무리 하는 시기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였던 것 같아요.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현실이고 피해갈 수 없는 섭리이며 창조의 법칙이기에 살아가면서 한 번씩은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라는 것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서두를 이같이 시작한 이유는 오늘의 본문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죠.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장면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러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다윗도 참전하였는데, 다윗이 피곤하였습니다. 싸우다 지친 것을 의미하죠. 그러자 거인족 사람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아비새가 그들을 무찌르고 다윗을 향해서 이제 왕께서는 전쟁에 나오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십시오. 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과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 벌어졌으나,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사람들과 거인족들을 다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21장의 중심구절은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중에 가장 마지막 구절인데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이 네 사람 가드의 거인족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에 다 넘어졌더라. 라고 기록하면서 21장을 마칩니다.
이 시기가 다윗이 젊고 용맹하던 시절은 아닙니다. 다윗도 이제 나이가 많았고 기력이 쇠한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더라도 장막에 거하면서 전략을 짜거나 명령을 내리는 일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서두에서 말했듯이 다윗이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죠.
하지만 본문을 보면 다윗은 실제 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전쟁을 치렀고 그 일로 인하여 피곤함으로 말미암아 기력이 쇠할 때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아비새가 다윗을 구하여주죠. 다윗은 굳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비새도 다윗을 향해서 왕은 이제 전쟁에 나오지 말아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은 더이상 전쟁에 참전하지 않아도 되는, 아니 전쟁에 참여하면 안 되는 상태였던 것이죠.
다윗이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기 몸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겠죠. 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이 지금 처한 상황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위기에서 다시 돌아온 시점이었습니다.
이전에 다윗은 어느 순간부터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저녁기도회 때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사무엘하 11장 1절에 보면 왕들이 출전할 전쟁에 다윗이 출전하지 않고 요압과 군대만 보내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어느 날 저녁에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보게 되는데요. 그 여인이 밧세바죠. 그 이후 다윗의 삶에 계속해서 위기와 실패가 찾아옵니다. 결국은 압살롬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피난민, 도망자의 신세가 되죠. 하지만 결국에는 압살롬의 반역을 잠재우고 다시 예루살렘성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과정에서도 베냐민 지파가 속한 이스라엘 10개의 지파와 유다지파 사람간에 갈등이 벌어져서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하죠. 그러니 지금 다윗의 입지와, 정세가 생각보다 불안한 그런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이 더욱 억지로라도 전쟁에 참전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직접 전장에 나가서 전투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또 백성들에게 왕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에 다윗이 아니었죠. 다윗은 노쇠하였고 예전의 기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더 빠르게 지쳤고 힘에 부쳤던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군은 거인족이었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쓰려뜨렸던 골리앗의 민족이었던 것이죠.
다윗이 그 거인족과 상대하면서 목숨이 위협받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왕년의 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젊었을 때는 물맷돌 하나 들고 나가서 가드 사람 골리앗을 단 일격에 쓰러뜨렸는데 그때가 나의 전성기었지. 라는 생각을 안 했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아마 그 생각 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힘이 빠진 자신의 두 손과 헐떡이며 가쁜 숨을 내쉬는 자신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없는데요. 사람이 죽음의 위협을 받거나 어떤 큰 사고를 당하게 되면 살아온 인생이 필름이 지나가는 것처럼 촤라락 지나간다고 하더라고요. 다윗도 급박한 전쟁에서 죽음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지난날들이 필름처럼 지나가진 않았을까요? 그 지난날을 돌아보며 다윗이 떠올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묵상과 결론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요.
이 사무엘하 21장은 사실 두 가지 사건을 통한 한 가지의 결론이 담긴 장입니다. 전반부는 1절부터 14절까지고요. 후반부는 15절부터 마지막 22절 까지죠.
어제의 본문이었던 전반부는 이스라엘에 임한 3년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브온 사람들의 청을 들어주는 내용인데요. 이스라엘에 가뭄이 임하자 다윗이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 흘린 피로 인해서 기근이 임했다고 일깨워주십니다. 그래서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속죄해야 하겠는지를 물어보자 자신들을 학살한 사울의 자손 일곱 사람을 내어주어 그들을 처형하게 해달라고 요청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자손 중 일곱을 택하여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을 처형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건이죠.
두 번째 사건은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전쟁을 하다가 죽을뻔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는 사건, 그리고 아비새의 간청과 다윗의 용사들이 거인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두 번째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대비되는 구도를 가지고 있죠. 사울의 집은, 결국에는 멸망 당하고야 마는 그런 저주와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을 그리고 있고, 그에 반해 다윗은 죽음의 위협에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목숨이 보존되는 장면입니다. 그 과정 중에 아비새가 다윗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죠.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라는 말을 남깁니다. 다윗을 향하여 왕이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의 등불을 꺼져버린 반면에 흔들리는 다윗의 등불은 여전히 밝혀져 있는 것을 대비되는 구도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몇 달간 사무엘 상,하를 묵상하면서 사울의 몰락의 과정을 보았고, 왜 사울이 그렇게 버림받게 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은 늘 성실했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은 삶을 산 것은 아니죠.
다윗도 불성실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했으며, 어떻게 보면 사울 못지않은 그런 죄악을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다윗을 지키셨으며 다윗의 인생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하나님이신가요? 왜 사울은 끝까지 추격하셔서 그의 자손들까지도 사울의 범죄함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만 했고, 왜 다윗은 범죄 하였음에도 그의 삶과 생명을 보전하여 주셨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성정을 가진 우리 인간의 관점이죠. 비유로 하자면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포도원 주인의 비유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있었죠. 일꾼을 모집하려고 아침 일찍 나가서 일꾼을 모집해서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꾼이 더 필요해서 제 삼시에도 나가고, 제 육시에와 구시에도 나가고 도 십일시인 늦은 오후에도 나가 일꾼을 구해서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모든 일꾼을 불러다가 약속한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죠. 그러자 아침부터 와서 일한 일꾼이 와서 집주인을 원망하죠. 그러자 주인이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너와 내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느냐. 내 것으로 내가 후하게 처사하는 것을 왜 악하다 하는냐? 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침부터 와서 저녁 끝나는 시간까지 일한 사람은 응당 시급으로 계산해서 10만원 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고, 오후 다섯시에 와서 한시간만 일한 사람은 만원 정도 받는 것이 우리의 생각으로는 정당한 것이 아닙니까? 일한 총량이 다른데 똑같이 대우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죠.
이 비유는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비유이지만, 이 비유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오늘의 본문에 대해서도 함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고 상식적인 수준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본문을 대하고 깊이 해석하다 보면, 사울과 다윗의 죄의 총량을 가지고 누가 누가 더 악한가, 누가 더 잘못했나를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사울의 범죄라고 보기엔 자기 의를 내세운 것, 제사를 자기가 먼저 드리려고 한 것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 요나단에게 나쁜 말 한 것 뭐 이런 수준 아닙니까? 게다가 다윗은 죽이려고 시도는 했지만 죽이지도 못했죠. 그런데 다윗을 보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전쟁 통에 보내서 맨 앞에서 총알받이처럼 죽이고, 압살롬을 아들이라고 감싸다가 그에 의해서 왕좌를 빼앗기고 군대와 백성들을 이끌고 도망다니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저주했던 시므이를 정치적으로 용납하고 진실한 므비보셋의 억울함은 풀어주지도 않고 하는 그 모습을 보면 사울보다 더 심한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만큼의 범죄함이 분명히 다윗에게 있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관점대로 보면 하나님은 좀 불공평하신가? 사울은 미운털이 박혀서 안빠진거고 다윗은 뭘 해도 용서가 되는 건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더 높은 차원에서 일하고 계신 섭리는 생각하지 않은 채, 내 기준과 판단에 맞추어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죠. 물론 상식적인 수준으로서의 일반적인 성서의 해석도 필요하지만, 하나님 관점과 더 높은 차원으로서 성경을 이해하려는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한계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경항이 생기게 되어버립니다.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이끄시는 시대와 흐름, 경륜과 섭리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을 넘어 한 민족과 한 시대 안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국가적인 차원 안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 사울과 다윗의 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영적인 인도하심을 우리가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서두에 드렸던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다윗이 거인족에게 위협을 받을 때, 그의 모든 인생이 파노라마 필름처럼 촤르륵 지나가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고백했을까요? 데자뷰처럼 골리앗의 얼굴과 이스비브놉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무엇을 고백했을까요?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시는 꺼져가는 등불 끄지 않는 그 사랑을 기억하며 고백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골리앗을 쓰러뜨린것도 내가 아니구나.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하여 포피 이백 개를 취한 것도 내 힘이 아니구나. 사울의 추격 앞에서도 피할 길을 내신 것은 하나님이시구나.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도 나의 힘과 능이 아니구나. 라는 것들을 깨달았겠죠.
또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내가 밧세바를 얻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인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이었구나.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받게 될 심판의 결과가 이러이러한 것이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도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라가족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어떤 고백과 어떤 깨달음으로 오늘 하루를 나의 일생을 살아가고 계신가요? 우리의 삶이 다윗처럼 사울처럼 왕으로 어떤 스팩타클한 삶의 여정은 아닐지라도, 우리 각자의 삶에서 치르는 그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다윗과도 같은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주신 소명과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유하게 부여하신 소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성실하게 이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인 것이죠.
요즘 저에게 다가오는 화두는 영혼의 깨어남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영혼이 깨어날 때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은 그 기이한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두움 속에서 헤매며 방황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계속해서 깨어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울은 어두움에 거하기를 선택한 인생의 구도를 보여주며, 다윗은 빛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구도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범죄하였음에도 그 심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상한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빛을 향하여 돌이키는 그 믿음을 인정받았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실패할 때도, 우울하고 괴롭고 공허한 날이 다가올지라도 사탄이 우리를 밀 까부르듯이 우리를 충동질할 때가 있을지라도 빛 가운데 거하기를 힘쓰고,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능력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실제로 진실로 인정하고 믿으며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충만하게 채움을 받는 그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상한갈대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 끄지 아니하시는 그 기이한 사랑을 기억하시면서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의 인생을 붙드시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였음에도 그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과 뜻이 다윗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함께 보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다윗보다 더 우리의 삶을 주목하고 계시며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 빛 가운대로 나아가 하나님 나라와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 이 시대 가운데 풀어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자녀와 가정을 깨우고, 나의 지체와 교회 공동체를 깨우고, 어두움에 갇혀있는 이들을 깨우는 소명을 감당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실한 자녀들을 기이하고 놀라운 빛 가운대로 이끄시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과 소명의 빛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새로운 피조물의 능력으로 빛 가운데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모든 심령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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