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승전가
(사무엘하 22:17~28)
사무엘하 22장은 다윗의 승전가 라고도 불리우는 장입니다. 다윗의 시와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다윗이 노래했던 것이죠. 그래서 본문을 한 구절 한 구절 살펴보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특히 하나님의 구원과 그 구원의 근거에 대한 고백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사실 이 승전가라는 내용의 문학은 승리를 쟁취한 사람이 부르는 찬가입니다. 곧 그 승리의 기쁨이 자기 성취에 대한 자아도취, 혹은 자신을 높이는 찬양이 주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죠.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을 인정함으로서 교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넘치는 감사로 승리의 영광의 주체가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성도의 삶의 승전가가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시작인 17절의 기록을 보면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시고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저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위로부터의 신앙을 고백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수평적 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존재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그 시선을 향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이 땅에서의 삶의 문제들 앞에서 일희일비 하지 않고 이 땅의 것들로 만족과 도움을 삼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17절의 고백에서 많은 물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18절에서는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물은 여러 어려움과 고난을 의미하는데요.
그런데 18절의 고백을 보면 자신이 원수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는데 그들이 나보다 강하였기 때문이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다윗의 여정을 계속해서 묵상하면서도 알 수 있지만 사실 다윗의 적수들 중에 다윗보다 강한 이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사울도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블레셋 사람들, 아말렉 사람들도 다윗이 그들이 어려워서 쩔쩔맨적은 없었습니다. 압살롬이야 아들이기에 그 아들을 향한 부정이 애틋하여 마음에 걸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다윗보다 엄청나게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그 모든 일을 대할 때 늘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물으며 행동했던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그들을 치러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라는 기도 앞에서 하나님의 사인을 얻었을 때 그때야 대적들을 향하고 승리를 얻었던 모습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죠.
다윗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난과 역경을 겪을 때 그의 신앙고백이 응축되어지고 단단해지는 시기를 거쳐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평안하고 안정감을 누릴 때는 사실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삶에 위기가 찾아오고 불안함과 걱정이 찾아오게 되면 그때서야 두 손들고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죠. 물론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폄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그 고난과 위기가 그 사람에게는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와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를 고난의 한가운데로 밀어넣기도 하시고 광야길에 거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벌어진 틈과 공백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게 되고 우리의 창조주를 기억하게 되는 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고난이 다가올 때, 그리고 광야의 시간은 우리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 신앙을 내면화하는 시기가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그러한 고난의 때를 만날 때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그 시간들을겸허하게 받아들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또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근원입니다.
본문 21절부터 25절까지의 다윗의 고백을 보면 좀 뻔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드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다시 읽어볼까요?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제가 저녁기도회 때 말씀을 나누면서 밧세바를 취한 이후의 다윗의 모든 행실에 대해서 다윗을 칭찬한 적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삶에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다윗이 범죄한 이후로는 좀 신앙의 모범과 본을 보일 만한 행동들이 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그런데도 다윗은 오늘의 승전가에서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아주셨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않았다. 게다가 24절에는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낯짝도 두껍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하나 두개가 아닌데, 그리고 아직 우리가 묵상할 본문은 아니지만 다윗이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하는 사건이 하나 더 남았거든요.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쌔까맣게 잊은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수치를 모르면 인간이 아니죠. 그래서 인간이 수치를 아는 것은 겸손을 향하여 나갈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되는 것인데, 분명히 17절부터 20절까지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잘 나아가다가 갑자기 21절부터는 자신의 의를 막 풀어놓고 있는 것이죠.
다윗은 왜 갑자기 이렇게 뻔뻔해졌을까요?
사실 뻔뻔해졌다라기보다는 다윗은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자기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면, 사울은 범죄 한 이후에 돌이킴이나 애통함의 모습이 없었지만,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난 이후에 애통하고 옷을 찢고 슬퍼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죄에 대한 아픔을 알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를 오롯이 감내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고난 받거나 고통받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그렇거든요. 무언가 잘못을 했을 때는 용서를 구하기는 하지만 합당한 심판과 벌을 받기를 구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 잘못하면 부모님이 물어보셨어요. 저는 회초리를 맞았거든요. 그러면 몇 대 맞을건지 물어보세요. 어렸을 땐 몰랐어요. 왜 물어보시지? 물어보면 무조건 한 대 아닌가? 매를 열대씩 맞고 싶은 아이가 어디있겠어요. 그래서 한 대요. 라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 한 대짜리 잘못은 한 대를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 대로 안 되는 잘못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면 한 대요. 라고 말해도 안된다고 말씀하세요. 그러면 고민을 합니다. 저도 양심이 있는지라 그러면 두 대요. 라고 말하지는 않고 고민하는 척을 해요. 몇 대를 맞아야 이 잘못에 합당한 징계가 될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하는거죠.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댓수가 합당하다고 여겨지시면 그만큼 회초리를 맞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께서 물어보셨던 이유는 이 잘못에 죄의 크기와 책임을 너가 알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무작정 징계만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 잘못한 것에 대한 합당한 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셨던 것 같아요.
다윗은 범죄 한 이후에 애통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그 징계를 오롯이 받아들였죠.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다윗의 완전함의 자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기에 이러한 은혜를 받았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자신은 범죄하였고, 넘어지고 주님의 법을 떠나기도 했지만, 그 상태로 버려지지 아니하고 내 손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그 규례를 다시 묵상하고 완전함 가운데로 나가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문제 앞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운 존재들입니다. 바로 이 죄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감당하셨다는 구속사적 교리를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신자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이 죄용서에 대한 교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눈보다 더 흰 양털보다 더 희게하시겠다는 분명한 약속의 말씀이 있지만,
아 약속은 약속이지만 어떻게 그렇다고 제가 진 죄가 없어지겠어요.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죄를 미워하고 죄를 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죄를 말갛게 씻기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다시 범죄 하고, 또 넘어지고, 하나님을 떠나는 때가 오더라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자리가 신자에게 있음이 바로 은혜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도 나의 의를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의의 길을 노래하는 고백임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만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의롭다고 할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언제나 완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완전함 앞에 성화 되어 가기를 기뻐하는 우리의 고백이 담겨야 하는 것이죠.
죄를 미워해야 하지만 죄에 옭아매어질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이 모든 것을 덮으시는 사랑이며 은총이며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완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안에서 자유하고 겸손하고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고난의 때를 지나며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짐을 믿으십니까? 믿음의 개념이 실제가 되는 것들을 누리기를 원하시나요?
질문2.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인정하십니까? 나를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그 위엄찬 선포를 나는 받아들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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