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로소이다
(삼상 8:10~22)
오늘의 본문은 왕을 세워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그들을 다스리게 될 왕의 제도가 무엇인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10절을 보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전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죠.
그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한 사건이 어제의 본문인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전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사무엘이 나이가 들자 자신의 아들들을 사사로 삼았습니다만, 그들이 아버지처럼 의롭게 행하지 아니하고 뇌물을 받고 재판을 치우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사무엘을 찾아가서 이러이러 하니 왕을 세워주십시오. 라고 말한 것이죠.
이 내용을 보면 한 인물이 떠오르죠 바로. 엘리가 떠오릅니다. 엘리도 자신의 아들들의 범죄함을 수수방관 하다가 그 가문이 저주를 받게 되는 심판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들이 왕을 요구하는 이유가 사무엘의 아들의 그릇된 행동 때문인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만약에 사무엘이 자신의 자녀들을 더 신경 써서 양육하였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말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만, 이미 그들의 마음에는 왕정제도를 원하는 본심이 담겨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제 본문인 7절과 8절인데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본성이 이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그들이 사무엘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죠. 그리고 그들이 원했던 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인간을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신앙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위에 영으로 말씀으로 임재하는 신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들을 섬겼던 이유는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우상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우상숭배를 금지 시키시면서, 하늘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속의 어떤 것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금송아지와 같은 눈에 보이는 형태와 형상을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또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참 쉬운 것은 아닙니다. 형상이 없는 말씀을 실체로 믿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죠.
또 인간의 몸을 입으셔서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사실 쉽지 않습니다. 깎아 만들어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상을 믿는 것도 쉽지 않은데, 우리와 같은 형상인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말을 하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아들인 인자를 믿는다는 것도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대상을 만들어놓고 그 대상에게 신적 권위를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죠. 예전부터 토테미즘과 샤머니즘들은 그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자연계에서 오래 살아남은 것들에게 신적 권위를 부여했죠. 그들이 말을 할 수 있어서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만, 인간이 스스로 그들을 신이라 칭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절했던 것처럼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본성도 그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일에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것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들의 본성, 애굽에서 종이 되어 애굽에서 섬겼던 신들, 그리고 광야를 지나 나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이방민족들의 우상들, 어떤 형태와 실체가 보이는 것 같은 바알이나 아스다롯 같은 그러한 신들처럼 눈으로 보고 섬길만한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상이 아닌 왕을 원하고 있지만, 그들이 왕을 요구하는 이유는 눈으로 보이는 어떤 실체가 있는 대상을 보내어 주어 우리가 섬길 대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였던 것이죠.
아마 그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있었다면,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는 새로운 사사를 세워달라고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왕정체제를 원하는 것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이방 나라와 같은 모습으로 살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엄히 경고하시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에 대해서 말하여주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이 너희를 다스리게 된다면 이러한 다스림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죠. 11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이 아래와 같습니다.
병거와 말을 다루게 하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하는 것은 전쟁에 끌려 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병거 앞에서 달리는 것은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죠. 너희는 좋은 것들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왕의 신하가 되어 고생을 하게 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17절의 말씀처럼 너희도 그의 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후에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여기서 말하는 그날은 왕으로 인하여 고통받을 때를 의미합니다. 고통받는 날이 와서 하나님께 도와달라는 울부짖음이 나오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던 이유는, 이러한 고단한 삶이 너희들에게 임할 것인데, 그래도 왕을 원하겠느냐? 라는 완곡한 회유의 말씀이시죠.
가끔씩 저희 아이들이 밥을 잘 안먹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프리카에서는 이렇게 좋은 밥도 못 먹고 옥수수가루에 물타서 밥먹는 아이들도 있다. 자꾸 이렇게 밥 안 먹으면 아프리카로 보낼거야 라는 반 협박적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엔 좀 통했는데 요즘은 애들이 조금 커서 이제는 안 통합니다. 안 보낼걸 알거든요. 저도 진짜 보내려는 마음은 아니죠. 이런 말을 한 것은 아이들에게 음식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함을 깨닫기 위해서 약간의 협박을 섞어서 밥을 잘 먹도록 회유하는 것이죠.
사무엘도 이러한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이유는 그들을 회유시키기 원함이었습니다. 왜 너희가 왕을 원하느냐? 차라리 새로운 사사를 뽑아달라고 해라. 너희는 제사장 민족이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민족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그 통치 안에서 복을 선포하는 민족이어야 하는데 왜 이방나라와 같은 왕정체제를 원하느냐? 라는 말을 좀 돌려서 말한 것이죠. 그리고 실제로 사무엘이 말한 왕정체제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에게 일어날 일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알아들었을 법도 한데 19절과 20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의 말을 들었지만 그 말 듣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왕을 요구하였으며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왕의 다스림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이 전쟁에 나가 우리의 싸움을 싸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나라와 같은 왕을 요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방 나라들처럼 조직력을 갖춘 군대와 그 군대를 통솔할 강력한 왕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호수아서나, 출애굽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전쟁은 어떤 강력한 리더십에 의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전쟁은 오롯이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전쟁이었던 것이죠.
그들에게 왕을 세워주신 것은 간절한 기도와 간청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그 응답은 징벌이며 심판이었습니다. 사무엘의 경고를 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고 반성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로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로 결의하였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력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내세우며 아니로소이다! 라고 외쳤던 것이었죠.
이 말은 들은 사무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 모든 말씀을 아뢰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듣고 왕을 세우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9장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세워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다윗의 때를 빼놓고서는 바람 잘 날 때가 없습니다. 폭군으로 인한 괴로움, 이방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전쟁이 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때 왕을 원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 때문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왕으로 인하여 고통이 임하여 내게 부르짖어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여전히 고통받으며 그 나라가 결국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했던 역사를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호세아서 13장 10절과 11절 말씀인데요.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백성이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방식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있는 것인데 그들은 육신의 눈에 만족할 만한 왕을 선택하기를 원했습니다.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듯 왕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로 인한 고난의 메시지가 들려옴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스가랴 말씀처럼 그들은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나히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선택대로 고난의 여정을 그들의 자녀들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 서는 믿음의 선택이며 믿음의 행위입니다. 내 눈이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직관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기에 옳은 길 같으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영적인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성에 따르기 싫어하여 거부하고 거절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때 내 마음는 평안이 임하였나요?
질문2.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눈 앞에 있는 즐거움을 내려놓고 믿음의 결단을 내리셨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때 내 마음는 평안이 임하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