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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시편5편

by 터틀곽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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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편

 

살아가다보면 말이나 글로 오해를 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서로의 의도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이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죠. 특히 요즘은 아주 빠르게 언어가 전달되고 말이 전달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휴대폰이 보급 된 이후 더욱 이러한 상황이 빈번히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내와 한집에서 살지만 집 안에서 카톡으로 대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군가는 방에 있고 누군가는 거실에 있을 때 굳이 나와서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지 않아도 카톡이라는 것을 이용하면 쉽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편리함도 있지만, 여러가지 단점도 존재합니다. 일단 글이라는 것은 표정이 없습니다. 특히 빠르게 쓰여지는 글일 수록 더욱 그리합니다. 빠르게 소비되지 않는 글은 많은 생각을 거쳐서 탄생합니다. 그래서 한글자 한글자 의미를 담고, 이 글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글을 만들어냅니다. 

 

예전의 저의 기억도 그렇습니다. 일단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전에 연습장에 써야 할 내용을 먼저 적었어요. 그리고 그 글을 읽으면서 여러번의 수정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단어와 문장을 읽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거죠. 그리고 그 몸글이 다 완성이 되면 그제야 정리 된 내용을 편지지에 옮겨적습니다. 글자도 신경쓰면서 적죠. 그러다가 글씨가 틀리게 되면 가차 없이 그 편지지를 버리고 새로운 편지지에 글을 다시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발전된 문명의 좋은 혜택을 누리면서 더욱 빠른 초고속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말과 감정이 함께 흘러가야 하는 그런 감성을 많이 놓친것 같습니다. 

 

또 이렇게 빠르게 전달되는 정보와 말들 속에서 새로운 은어가 생겨났는데요. 좋은 말은 아닙니다만 읽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도 카카오톡이 들어온 다음에 생겨난 신조어 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상대방이 보낸 글을 읽고 나서 아무 대꾸가 없는 것을 읽씹 이라고 합니다. 글을 읽고 답장하지 않았다. 라는 뜻의 은어죠.

 

그런데 이것도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또 상황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이 일로 인해서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런것도 빠르게 소비되는 말과 감정에 대한 오해가 이런 일들을 만들어내죠.

 

그래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가 옛적부터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속담도 많고 명언도 많고 격언도 많이 내려오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과 소리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는데요. 말씀을 한구절 한구절 살펴보면서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시편 5편의 말씀입니다. 이 시편 5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절부터 7절은 하나님께 나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간구이고요. 8절부터 12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 근거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주제나 상황에 대해 짧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머릿말을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피리나 플롯과 같은 관악기에 맞추어서 불러진 노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시는 애가 시편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애가는 슬플 애 자와 노래 가자를 쓰고 있는데요. 고난과 애통함 중에 있을 때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1절과 2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간절한 간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세 개의 강조문을 사용해서 이 다급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귀를 귀울여 주소서, 헤아려 주소서, 들어주소서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와같이 거듭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다윗이 직면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빠르게 개입하여 주셔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드리는 강렬한 요청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께 간청하면서 자기 자신과 상황을 드러내는 단어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말과, 심정과 부르짖음입니다. 이 단어들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의 원리와 방법을 배울 수 있는데요. 그중 첫째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 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자신의 심정을 담았습니다. 말과 마음이 서로 동하면 엄청 큰 시너지를 냅니다. 

 

저번주에 시편 4편을 나누면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솔직한 인물이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러니 다윗의 이 말과 감정에 얼마나 충실하면서 이와 같은 고백을 하고 있겠습니까. 

 

내 말좀 들어주세요! 내 마음좀 알아주세요! 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이죠. 2절에는 거기다가 부르짖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르짖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모든 감정을 터뜨려서 울부짖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사실 그럴일이 많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문화가 또 좀 아주 점잖은 문화기도 해요. 감정에 솔직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 당할 때가 많이 있어요.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또 청소년, 청년 모임을 인도하면서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감정언어를 물어봅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어때? 라고 물어보면 잘 대답을 못해요.

 

좋아요. 괜찮아요가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할 때가 사실 많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아요. 비록 구사할 수 있는 언어 자체가 많지는 않지만, 느끼는 감정들을 잘 표현합니다. 화가나면 삐지기도 하고 속상하면 울기도 하고 신나서 웃기 시작하면 십분이고 이십분이고 쉬지 않고 웃기도 해요. 그리고 그 감정을 잘 이야기 합니다. 이러저러해서 지금 기분이 이렇다 등등 잘 이야기 하죠.

 

그런데 성인이 되어갈 수록 이 감정이 많이 거세 됩니다. 이러면 발생하는 큰 문제가 있는데요. 기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플 때 슬퍼하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너무 감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건조해지는 것도 좀 문제가 됩니다. 

 

이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큰 축복과 선물이거든요. 이 감정을 통해서 우리는 용기를 얻기도 하고 사랑을 하기도 하고 용서를 하기도 하고 희생을 하기도 합니다. 의지가 발현되는 통로와도 같은 것이죠.

 

다윗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 나의 말에 귀좀 귀울여보세요. 내 심정을 좀 헤아려주세요.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지 않습니까?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자기 감정과 상황에 충실하면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간절함은 하나님을 향한 식지 않은 열렬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의 두 가지 방법을 모두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용한 가운데 올려드리는 묵상의 기도 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피어나는 고백들을 올려드리는 것이죠. 아니면 그것을 조용히 읇조리며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우리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르짖음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흐느낌 통곡, 애통함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부르짖음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감정을 더욱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쏟아내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는 부르짖다라는 표현이 생각보다 엄청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부르짖음이라는 단어를 정말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인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어 자신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크게 소리를 꽥꽥 지르라는 말씀이 아니라 간절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마음을 더욱 진실하게 신실하게 만들게 됩니다. 

 

이후 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3절에는 아침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오는데요. 구약에서 이 아침은 주님의 도움이 임하시는 시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에 동이트는 것을 바라보며 어두움을 물리치고 태양이 떠오르듯이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빛과 어두움의 구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구절들을 우리가 많이 발견 할 수 있는 것이죠. 다윗은 이렇게 아침에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이후 바라리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요. 이 바라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차파 라고 하는데요. 이 뜻은 살피다, 감찰하다 파수하다, 밖을 살펴보다. 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내가 기도한 이후 밖을 살펴 보겠습니다. 곧 내가 기도한 후 응답과 축복이 임할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도 이후 기대하고 꿈꾸는 것은 신자가 가져야 할 믿음의 태도 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린 이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열매를 맺기까지는 계속해서 농부의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지만 가을에 귀하고 탐스러운 과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모든 수고 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마다 비를 주시고 때마다 알맞은 일조량을 허락해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

 

바울은 복음을 심었고 아볼로는 그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이 한 사람의 심령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씨만 뿌려두고 살피고 돌보지 아니한다면 추수때에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를 드렸다는 이유로 우리가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면 안된다는 것이죠. 

 

심겨진 기도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살피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이런 슬로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아도 될만큼 준비하고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될 것처럼 기도하라. 

 

이 이야기는 어떤 뜻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되 우리의 노력과 헌신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최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간절한 기도를 올려드렸다면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열심을 다해 일하십시오. 그리고 그 열매를 보게 되는 그 날에 기쁨과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 일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늘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죠.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자세는 이와 같습니다. 삶의 중심과 태도와 언어와 고백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이죠.

 

꼭 내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옳으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현재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 교묘히 들어온 성공주의와 세속주의가 성도의 영적인 감각을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우리 마음의 깊은곳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더 많은 부요함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후에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악인들의 행악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은 불변하시는 진리이기에 하나님은 영원히 죄악을 멀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악인은 주님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머물다. 어울리다. 유한다 라는 뜻은 누구의 손님이 된다 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에 대해서 기록된 성경 구절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고대 근동 지역에서도 손님을 환대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과 다르게 당시에는 숙박시설이 잘 되어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고 가는 길도 거칠고 늘 강도와 도적들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나그네나 여행객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연약함에 빠져있는 이들을 외면치 말아야 하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그네이고 손님일지라도 악인은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를지라도 그는 하나님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은 5절과 6절에서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만한자, 행악자, 거짓말 하는자, 살인자, 속이는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만한자는 주님 앞에 설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만한자, 곧 교만한자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자들입니다. 이미 교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높이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주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임재 앞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5절의 말씀에 교만한 자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신 말씀은 인간의 감정으로서의 미워함이 아니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미워하심은 인간의 감정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심은 오히려 더욱 철저하시고 미워하시는 것들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와 조금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1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악을 미워하심은 더욱 철저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거짓말 하는 자를 멸망시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거짓말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거짓의 근원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태초부터 인류를 속임으로 죄악을 범하게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마귀를 향하여 그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6절에 기록된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는 거짓을 말하는 자의 죄의 점진적인 발전과 결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상하게 하고 피를 흘리게 만들고 죽이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쓰는 행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후에 7절에서 다윗은 그러한 악인과 다르게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예배자가 될 것을 다짐하고 있는데요. 7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이 땅가운데 머물고 있다는것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다윗은 비록 악인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윗이라도 자신의 의와 선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이 무엇이라 고백하고 있습니까?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와 선이 아니라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주님의 풍성한 사랑과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인 사랑만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주의 집에 들어가리라는 것은 어떤 건물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임시 처소로 지은 다윗의 장막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곳에서 주님 계신 그 성전 그 임재가 머무는 곳을 향하여 예배하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오라가족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기도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참된 예배자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그렇게 진실하게 모든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계신가요? 

 

나의 형편이 좀 나아지거나 조금 더 여유로워지면 그때 주님을 위해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신자의 삶의 자세는 온전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되고 악을 행하는 이들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자신을 찾는 이들에게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며 그 사랑을 간절히 찾는 이들에게는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교만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주님을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교만한자를 멀리하시고 악을 행하는 이들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 뜻을 따라 살아 가기에 힘쓰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끊없는 사랑하심과 용서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과 감동하심과 감화하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가기에 힘쓰는 모든 믿음의 식구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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