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편
시편 (4:1~8)
조지 허버트라는 영국의 시인이 있는데요. 그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는 낮의 열쇠요 밤의 자물쇠이다.
열쇠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잠겨져 있는 무언가를 열어야 할 때, 그리고 무엇을 잠궈야 할 때는 자물쇠를 사용합니다. 곧 열쇠와 자물쇠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죠.
상반되면서도 맞물려있는 열고 잠그는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만큼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데 가장 필요하면서도 유용한 수단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4편도 다윗의 탄원이 담긴 고백입니다. 우리가 저저번주에 함께 나누었던 시편 3편은 보통 아침에 부르는 찬송시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 4편은 저녁에 그리는 찬송시라고 합니다. 시편은 다윗의 고백으로 기록된 시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공동체가 함께 고백하는 기도문이 되었습니다.
이 시편 4편은 3편에 나타난 표현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어서 두 시편 사이의 많은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나의 영광, 눕고 자다 라는 표현이 동일하고 등장하고 있고요. 많은 사람이 말하고 있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으며 부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관성을 통해서 이 시편3편과 4편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각각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모범으로 사용했다는 전통을 뒷받침 하기도 합니다.
시편 3편의 고백을 아침에 드렸던 이유는 이제 하루를 시작하며 마주 할 여러가지 상황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리라는 고백을 올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편 3편 7절의 고백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고백을 올려드렸죠.
또 시편 4편은 저녁에 드리는 기도문으로 사용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왜 이 시편 4편이 저녁기도문 이었는지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4편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내 의의 하나님이란 말씀을 히브리 원문으로는 엘로헤 티데키라고 쓰였는데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하셨다 라는 뜻보다 나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으로 나의 상황을 판단해 달라는 고백입니다.
이 ‘의’라고 하는 우리말을 영어성경에는 righteousness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뜻 안에는 정직함, 공정함, 정의로움 이라는 뜻도 있고요. 고결하다, 고결한 행위 라는 뜻도 있습니다.
곧 이 의라는 것은 옳은것, 바른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큰 의미로서는 완전함, 완전함으로서의 성결함과 순결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완전하고 거룩함과 선함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의로움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기준과 판단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상식으로는 이것이 의로운 것이다. 이것이 상식적이다. 이것이 바른 것이다. 이것이 옳은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생각과 상식 그것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인 우리는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의 생각은 약하고 부족하오니 하나님의 온전한 의로 우리를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기도를 드릴 때 말씀하여 주십시오. 응답해주십시오. 가르쳐주십시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에게 닥친 이 상황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내가 마주하는 상황들을 하나님의 차원으로 이해하게 해주십시오. 라는 고백을 올려드리는 것이 기도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시편을 살펴보면 시편 여러곳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부르짖을 때, 응답 하여 주시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가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되도록 해주세요. 아멘. 끝.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기도의 모범적인 자세 입니다.
설교 서문에 기도는 열쇠 와도 같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곧 이 기도를 통해서 감추인 것들이 열리도록 간구해야 하는 것이죠.
먼저 시인은 1절의 말씀을 통해서 곤란에서 너그럽게 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곤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차르 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이 뜻은 묶다. 제한되다. 괴롭히다. 좁다. 부족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그럽게 하다는 자리를 넓히다. 마음을 크게 갖는다 라는 뜻인데요. 곧 곤란중에 너그럽게 하셨다는 말씀은 좁은 골짜기에서 군대에 포위된 상황에서 그것을 뚫고 넓고 광활한 지역을 빠져나오는 승리, 혹은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해있는 상황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사방으로 우겨싸임을 당한 가운데에서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살펴보면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로 끝나고 있는데요. 이 동사는 완료형 동사인 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상황과 형편이 이미 회복되었기고 승리하였기에 이런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다윗이 경험하였던 응답에 의거한 고백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셨던 신앙체험에 근거하여서 확신에 찬 기도의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이죠. 이미 지난날에도 나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의 상황도 평안함 가운데로 너그러움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면 기도하는 것이 당연지사 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갑자기 어려움을 만나면 모든 신의 이름을 다 불러가면서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허공에 떠도는 소리일 뿐입니다. 기도는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하고요. 또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응답을 받은 경험이 있는 신자들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때도 어느정도 관계가 있고 친밀도가 높은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게 쉽습니까? 아니면 서로 이름만 알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쉽습니까? 당연히 친밀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쉽죠. 어려운 일일 수록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만 알고 전혀 친밀함 없이 살다가 내가 만난 환난 때문에 아이고 주님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 중 어느 기도가 응답이 빠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오래참음과 용서의 하나님이시면서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도 나를 찾고 찾는 이를 만나주신다고 말씀하셨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가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이루어 시인의 고백처럼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 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생들아는 벤 아담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요. 이는 벤은 아들이라는 뜻이고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곧 사람의 아들아. 혹은 어리석은 인간의 아이들아.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인생들아 라는 지칭은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을 향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인생들아. 인간의 아들아 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가진 한계와 유한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결국 자신을 반역하고 역모를 꾀한 그 모든 것들이 헛됨으로 허사로 돌아갈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죠.
압살롬은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는 인생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압살롬의 이복동생 다말을 겁탈한 동생 암논을 죽이기 위해서 거짓으로 성대한 잔치를 차려놓고 압놈을 그 잔치에 초대해서 죽입니다. 또한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다윗을 속이고 민심을 도적질 하기도 하였죠.
하지만 그의 결국은 비참한 종말로 끝이 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버린 인생은 거짓과 헛된 것을 좇다가 끝나게 되는 인생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5절과 2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영광스러운 것을 헛된 것과 거짓된 것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우리의 생애, 시간, 물질,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나의 욕심과 이 땅에 썩어질 것만을 위하여 쓰는 사람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발견하지 못한채 그것을 낭비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지혜있다고 하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헛된것을 구하는 거짓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본문 2절의 말씀과 바로 대조되는 말씀이 3절에 뒤이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본문2절에서는 헛되고 거짓을 구하는 압살롬과 같은 이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책망하는 말씀을 전하고 그 이후에는하나님께서 세우신 경건한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대조는 문학적인 장치로도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경건한 자는 보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선한 사람들로 볼 수도 있지만 시인의 입장으로서는 압살롬과 대비되는 다윗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 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하시드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이 하시드는 헤세드의 파생어 입니다. 이 헤세드는 친절, 자애, 인자, 사랑,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요. 곧 이 경건한 자는 친절하며, 자애로우며 인자하며, 사랑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와 같이 경건한 사람은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택하신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이 택함이라고 하는 것은 구별되거나 특별히 취급되는 사람에게 쓰이는 뜻입니다. 특히 이 택함이라는 단어는 거룩이라는 단어와도 본질상 같은 단어입니다. 거룩의 가장 큰 속성은 구별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구분하셨다, 혹은 경건한자를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경건한 자는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는 무리들이 있었죠. 바로 바리세인과 서기관 같은 이들은 그 경건함을 자기 의로 드러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시인이 말하는 경건함은 하나님이 구별하여 택하신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경건한자는 자신의 의로 경건케 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경건함을 위하여 구별하신 인물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내 의의 하나님이여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우리들 곧 신자의 삶에 적용해 보길 원하는데요.
시편에서 말하는 경건한자 라는 호칭은 성도를 의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도가 된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우리의 의로 말미암은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된 것은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것, 우리를 경건하다,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경건한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약적 관계 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경건과 거룩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내어주시는 거룩한 칭호입니다.
그래서 3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알아야 한다. 너희가 경건한자로 택함 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이 말씀에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은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나는 경건한 자 입니다. 나는 택한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2절의 기록된 인생의 헛된 것을 좇는 자들 처럼 헛된 것을 위하여 나의 삶을 거짓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거룩하고 영광된 구별됨, 경건한 신자가 죄악 가운데 거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3절의 마지막 고백은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실 것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곧 경건한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고백이죠. 이 말씀은 1절의 고백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1절의 시작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라고 시작하고,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죠.
그리고 3절의 후반부에도 여호와께서 들으실 것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 확신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의로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삼는 것과 동일한 고백이 되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라가족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 확신은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까? 우리 자신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의가 되신 분이 계시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그래서 우리도 다윗과 같은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착하기 때문에 내가 선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어떤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주일학교 교사이기 때문에 찬양대이기 때문에 집사이기 때문에 목사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의로우신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를 외면치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더욱 의지해야 할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입니다.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인자하심과 우리를 위한 사랑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찬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경건케 하시고 거룩케 하신 이와 함께 의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서문에 이 기도문이 저녁기도문이라고 말씀 드렸었는데요. 우리의 하루의 삶을 마무리 하면서 나는 오늘 하루 무엇으로 살았는가? 죄악과 거짓과 헛됨이 만연한 세상에서 그것들과 함께 살았는가 아니면 나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생명의 능력으로 살았는가를 깊이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 주신 능력으로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내 몫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며 온전히 주님을 따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시편 4편에 곡조를 붙인 찬양을 함께 들으며 묵상하길 원하는데요. 오늘의 설교 내용을 기억하시면서 함께 이 찬양의 고백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 시편 4편의 말씀을 통하여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의 고백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우리도 의로우신 하나님을 날마다 찬송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게 하여 주셔서 헛된일을 버리고 거짓됨을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친밀함 가운데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과 온전한 동행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의 의가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과 겸손하게 주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감화하심과 이끄심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과 회복을 갈망하는 모든 심령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