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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시편 4편(2)

by 터틀곽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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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2)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에 희노애락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슬플때는 한 없이 슬퍼지며 또 기쁠 때는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랑할 때는 모든 것을 내어줄 듯이 사랑하기도 하고요. 또 화가 나거나 분노할 때는 그 분을 다스리지 못하여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신 편인가요? 아니면 감추고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신가요? 

 

저는 시편을 읽으면서 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묵상하고 생각할 때마다 참 솔직한 인물이다. 라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다윗의 성품을 성경을 통해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가 지은 이 시편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의 다윗은 정말 솔직하고 모든 것을 다 꺼내어 보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모두 꺼내어 놓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실하게 의지하였는지. 또 얼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였는지를 보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누나가 미국에 있으면서 어머니하고 통화를 하면 기본 두시간에서 세시간을 통화 하더라고요. 물론 떨어져 있다보니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겠지만 중요한건 거의 매일 그렇게 통화한다는 겁니다. 아니 할말이 그렇게 많은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그런데 저희 아내도 보면 장모님이랑 한번 통화를 하면 참 오래 통화를 하더라고요. 엄마와 딸의 관계는 약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엄마한테도 다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있죠. 아마 저희 누님도, 또 저희 아내도 엄마와 정말 많은 대화를 하지만 그래도 이것 만큼은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죠. 걱정을 시켜드리지 않기 위해서라던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라던지 그런것이 많지는 않아도 한 두개 정도는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감싸시고 싸매시고 드러내지 않는 분이십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죄악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토로하고 쏟아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도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이 시편이라는 기도문과 찬송시를 통해서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저번주에도 우리가 함께 시편 4편을 묵상하였는데요. 저번주는 3절까지만 강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3절 이후 4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오늘 한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억나실지는 모르겠지만 시편4편은 3편과 짝을 이루며 3편은 아침에 고백하는 찬송시, 4편은 저녁에 고백하는 찬송시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하루를 보내고 마무리 하면서 이 시를 읇조리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찬양하는 것이죠. 

 

4절의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 

 

여기서 떨다 라고 하는 히브리어 라가즈는 분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를 짓지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이는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을 향한 교훈과 책망의 말을 남기는 것이죠. 너희는 분노함으로 떨 수는 있으나 죄를 짓지는 말아라. 범죄하지는 말아라. 속에 있는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잠잠히 침묵하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보자면 이런 뉘앙스가 아닐까 싶은데요. 아들아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면 안된다. 잠자리에 누워서 깊이 반성하면서 너의 잘못을 기억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얼마나 큰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나를 곤경과 어려움에 빠뜨린 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그 분노를 삭혀야 합니다. 너무 열이 받으면 자다가도 벌떡 벌떡 깨죠. 그래서 그의 악한 행위를 저주하고 망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인데요.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곤경에 빠뜨린 압살롬을 대하여 너그럽게 그를 살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죠.

 

이후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4절의 말씀에는 압살롬과 그 추종자들을 향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를 가르쳤다면, 5절에서는 그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의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1절의 내 의의 하나님 이라는 구절과 맥을 같이 하는 구절입니다. 저번주 설교를 통해서도 말씀 드린 바 있지만 1절에서 말하는 의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나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라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었죠. 

 

그렇기에 의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나아갈때는 나 또한 그 의로우심 앞에 설 수 있는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5장 7절을 살펴보면 압살롬이 다윗을 배신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년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데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11절에는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처럼 압살롬은 정치적인 야욕을 이루기 위해서 거짓으로 제사를 드리고 이용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러한 압살롬의 마음을 알았기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질 것을 그리고 의로운 마음으로 제사를 드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얼마전에 유투브를 보다가 어떤 알고리즘에 이끌려 이런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함께 보시죠.

 

법정 스님의 설법 중 나온 영상인데 신앙을 가진 신자라면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는 대상은 영원히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예배하는 대상과 예배하는 이유에 대해서 바르게 인식하지 아니하면 지극히 종교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죠. 불심도 특심이면 진리를 추구하게 만드는데,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면서 사람의 손으로 새긴 불상 앞에 절하는 사람들보다 못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신앙이겠습니까?

 

진실하고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다면 다윗이 말하고 있는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모습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후 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공동번역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까? 라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많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보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피해 피난길에 오른 여정이었는데요.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에 다윗의 통치를 신뢰했던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피난길에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제가 피난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어서 이 피난의 여정이 얼마나 고된지는 알 수는 없으나 상상은 할 수 있잖아요. 아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는 그런 고난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윗을 따르는 자 중에 자신의 운명에 대해 회의를 품은자들의 탄식도 당연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냥 살던 집에서 살면서 압살롬이나 따르면서 살걸.. 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겠죠.

 

다윗은 그 탄식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선 다윗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주님의 얼굴 빛을 비춰 주십시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회의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대적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탄식과 회의적인 상황도 극복해야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다윗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좌절감도 함께 극복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신앙의 연약함을 경험할 대가 많이 있습니다. 경기가 어렵고, 물가는 상승하는데 월급은 안오르고 또 이자는 왜 자꾸 오르는가 사는게 왜 이렇게 힘든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라는 탄식이 나올 때가 있죠. 이런 와중에서 누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까 그 누가 좋은 일을 우리에게 베풀어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일은 보통 무엇입니까? 아 로또 한번 당첨되면 좋겠다. 금리가 내려가면 좋겠다. 갑자기 처음보는 먼친척 중 외삼촌이 오셔서 상속자가 나 밖에 없어서 전 재산을 물려주면 좋겠다. 등등 이런 상상 한번쯤 안해보셨습니까? 다들 형편이 괜찮으신가보네요? 저는 제가 처한 상황들 속에서 종종 어떤 사람이나 신비한 일들을 통해서 그 일들이 해결되기를 바라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주님의 얼굴 빛을 비춰주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6절에 기록된 선이라고 기록된 단어 히브리어 토브는 축복을 의미하는데요. 보통은 추수때의 수확물, 혹은 때에 맞게 내리는 비를 가르키기도 하고요. 일반적으로는 땅에서 얻는 물질적인 복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땅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구하는 많은 인생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언약적인 축복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이 땅의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후의 다윗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먼저 7절인데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 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6절의 말씀에서 선이라고 하는 토브가 추수때의 수확물을 의미한다고 말씀 드렸었는데요. 이후 7절의 다윗의 고백에서는 주님의 얼굴을 볼 때 내 마음에 주신 그 기쁨이 곡식과 새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욱 기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에게 임한 기쁨은 이 땅의 그 어떤 풍요로움보다 더 큰 만족감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한가지는 진정한 행복과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안식과 위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누리는 추수의 기쁨은 가장 값진 기쁨일 수 있습니다. 힘들게 땀을 흘리고 수고한 노동과 인고의 시간을 통해서 얻은 수확물이 얼마나 보람찬 열매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의 심령속에 흐르고 있는 만족감과 기쁨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은 순간의 만족감은 줄 수 있으나 그것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후 다윗은 8절에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이 말씀은 시편 3편 5절에서도 고백하였던 구절입니다. 3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죠.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 말씀을 통해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안정감을 누리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시편 127편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고질병 중 하나가 불면증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거죠.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스트레스일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경로도 여러가지 입니다. 생각할 것이 많고 번뇌가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욕심으로 인해서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지적하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본문의 다윗은 평안 가운데 눕자마자 잠이들어버리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가 비록 피난중에 돌베게를 베고 잠들었을지라도 그 평안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평안을 맛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성경에는 평안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세상이 알수도 없는 줄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저는 많지는 않지만 이 평안 가운데 머물렀던 경험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너무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내다보니 이 평안의 깊이 가운데로 나가지 못한 날이 더욱 많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제가 경험했던 이 평안은 정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두려움도 걱정도 염려도 범접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과 나 자신만 마주하는 평안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찰나와 같았지만 그 어느것보다 따뜻하고 포근했고 위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를 추억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누리고 경험했던 그 평안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습니다. 다윗이 가장 평안했던 때가 언제였을까를 한번 생각해보았는데요. 아마 양을치던 목동의 때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때도 한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양을 치고 돌보느라 바쁘긴 했겠죠. 

 

하지만 양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너른 풀밭에서 꼴을 먹이면서 잠쉬 바위에 걸터앉아 쉼을 가질 때, 다윗은 많은 노래를 지어 불렀을 것입니다. 다윗이 목동일 그때는 세상의 칭송이 없었고, 아내와 많은 자식이 없었던 때이지만, 하나님 한분으로 완전한 충만을 누렸던 그때를 다윗은 늘 추억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이 틈과 삶에서 일어나는 유격들 앞에서 잠잠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고요한 시간은 조용한 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시간을 뜻합니다. 분주하고 바쁜 와중에 만들어내는 틈새 사이로 우리는 고요함중에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평안을 사모합시다. 하늘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놀랍고 위대한 일을 묵상하며 그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묵상하며 삼위 하나님 앞에 잠잠히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크고 놀랍고 위대하심이 사랑의 옷을 입고 우리를 맞이하시는 그 놀라운 평안 가운데로 나아갑시다. 이 평안을 목말라하며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이 찬양을 함께 고백하길 원하는데요.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우리 영혼에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함께 찬양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우리의 소망이 되시며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 당신만을 신뢰하며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상황과 상태가 어떠함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변치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과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안을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모든 심령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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