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7편
시편 7편은 탄원시 입니다. 특히 이 시편 7편을 설명하는 중에 다윗의 식가욘 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는데요.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식가욘이라는 뜻은 가변곡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가변곡이라는 것은 어떤 노래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조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곡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 따라서 변조되는 것을 가변곡이라고 부르는데요. 갑자기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장조로 시작했다가 단조가 되었다가 다시 장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 7편을 살펴보면 한 구절은 하나님의 승리를 찬양하다가 다른 연에서는 고통과 탄식을 쏟아놓기도 합니다. 곧 인생의 길 가운데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것처럼, 시인의 삶에서 경험되어진 고통과 아픔, 괴로움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이 시편7편은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 라는 설명도 함께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 베냐민 사람 구시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나뉘는데요.
첫번째는 사울을 의미한다는 의견이 있고요, 두번째로는 다윗이 피난길에 오를 때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다. 혹은 사울 왕에게 다윗을 다윗을 몰래 고발했던 사울의 심복일 것이다. 라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정확하게 이 구시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어쨌던 다윗을 중상모략하여 도망다니게 만든 사람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구시라고 불리우는 사람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했던 상황 중에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죠.
먼저 다윗은 1절과 2절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2절에 사자라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사실 여기 계신 누구도 사자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갖거나 사자에게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는 분들은 없으실 것이사 생각 됩니다. 우리의 정서와 문화에서 사자는 동물원에나 있는 동물이고요. 게다가 유투브를 보면 요즘은 사자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영상도 종종 나오기 때문이죠. 그러나 고대의 근동 지방에 있었던 사자는 길들여서 동물원에서 키우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나는 사자는 맹수 그 자체였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잡아서 사정없이 찢어 죽이는 최상위 포식자가 바로 사자였던 것이죠. 사자는 먹잇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먹잇감을 포착하면 바람을 등지고 엎드려서, 최적의 때가 오기 까지 오랜시간 지켜보다가 사정거리가 가까워지면 단번에 달려나가서 정확하게 목덜미를 물어 뜯어서 그 먹잇감을 단번에 죽입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쫓는 이들을 사자로, 자신은 먹잇감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에 있는지를 토로하고 있는 것이죠. 말씀 드렸다시피 이 사자는 최상위 포식자 입니다. 최상위 포식자에게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사자보다 강한 이에게 의탁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주님께 피합니다. 그러니 사자와 같이 나를 해하려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요.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시편에 담긴 다윗의 처절한 고백이 저에게는 잘 이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살면서 누군가 나를 해하려하고 죽이려고 하는 그런 긴박한 상황 가운데 처해본적이 사실 없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원수가 생기기도 하고 싫고 불편한 사람, 아니면 실제로 직접적인 해를 가하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누군가가 내 목숨을 해하려하고, 나를 억누르고 갈기갈기 찢어놓으려는 대적들이 사방 천지에 깔린 경우는 사실 드뭅니다.
그런데 이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만 괴롭고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를 모함하고, 나를 함정에 빠뜨려서 넘어뜨리려 하고 말로 상처를 주고, 트집을 잡거나, 무시하거나 하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이죠.
물론 그러한 상황이 단번에 사자가 목덜미를 무는 것처럼 나를 찢고 뜯어서 죽일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고통과 괴로움이 지속되어 그러한 것들이 쌓이게 되면 그 영혼이 결국에는 찢기고 상하여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만약 누군가 나를 모함하고, 나를 미워하거나 무시하고, 말로 상처를 주고, 트집을 잡았을 때가 있으셨습니까? 만약 있으셨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예전의 저를 돌아보면 저는 잘 대처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 그럼 저도 그 사람을 미워하는거죠. 니가 나 미워해? 오케이 알았어 나도 이제 너 미워할거야. 너가 나를 무시했어? 나도 이제 너 무시할거야. 나를 트집잡았어? 너는 얼마나 잘하나보자. 실수만 한번 해봐. 라는 식으로 대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의 방식 입니다. 당연한 것이죠. 내가 공격 받았기 때문에 내가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격받은 이후 느끼게 되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과 행동들에 대해서 딱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불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나의 분노와 대적이 정당하다고 정당방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이러한 상황이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실 성격이 둥글둥글하기도 하고 좋은게 좋은거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신앙적인 성장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 자체를 피하거나 만들지 않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는 감정이 상한대로 똑같이 미워하고 무시하고 안좋은 감정으로 대적했던 기억들이 있는 것이죠.
또한 신자들은 늘 이러한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굶주린 사자같이 먹잇감을 찾아 두루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그 먹잇감을 욺켜쥐기 위해서 오랜시간 기다리고 공을 들이고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에는 그 먹이를 물고 찢고 뜯어내어 버림으로서 신자의 영혼을 깨뜨리고 피폐하게 만들어서 결국 사망의 올무로, 지옥의 구렁텅이로 던져넣으려고 할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깨뜨리기도 하고, 환경을 어렵게 만들기도 할 것입니다. 또 생각과 마음에 부정적인 것들을 집어넣어서 그 마음을 병들게 하여 하나님을 떠나게도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고백을 한번 살펴보면요. 다윗은 1절의 시작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죠.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합니다.
먼저 이 피한다. 라는 단어는 적극적인 대적과는 거리가 먼 단어입니다.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에 사자와 같기 때문에 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다윗의 경우,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위협이 여러번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상황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다녔을 때,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몇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 베어서 사울을 살려주었었죠.
시므이가 자신을 향해 저주했을 때 다윗을 호위하던 병사 몇명을 보내어 단번에 그 입을 다물게 하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죠.
주님께 피하겠다는 이 고백은 나는 너무나 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대적은 사자처럼 너무나 강하고 무섭고 떨리기 때문에 드렸던 고백은 아닐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연약한 소년의 몸으로 자신의 키의 몇배나 되는 골리앗 앞에서 주눅들지 않았던 다윗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께 피하겠습니다. 라는 이 다윗의 깊은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이 상황에서 자신을 신원하여 주시고 자신의 결백과 의를 드러내 주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얼마든지 자신이 나서서 그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포피를 백개나 베어오라고 했을 때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민심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기세를 힘입어서 사울을 끌어내리고 왕위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까닭없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그 동굴에서 만났을 때에 단칼에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감정대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피함으로 자신의 영혼이 상하거나 망가지지 않기를 간구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뜻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했고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하나님께 피함으로 그 상황을 겸손히 주님께 올려드렸던 것이죠.
우리도 그렇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미워하거나 박해하는 자들이 있을 때 내가 힘이 있는 상황이라면 내가 가진 힘이나 상황이나 여건들을 통해 그것을 대적하거나 복수하거나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적으로 힘이 없어서 혹시 그렇게 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을 마음껏 저주하거나 내 마음에 미움을 계속 키워냄으로 인해서 악한 감정을 품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담긴 다윗의 기도의 고백을 통해서 신자가 고백해야 할 기도의 자세, 삶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죠.
신학자 플루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인 행위이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과 같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의 도리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하나님을 닮은 이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이 기준이 어느정도의 동의를 얻어낸다고 보십니까? 당연하다. 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아니면 생각보다 이 기준이 잘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사실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하지만 사실 이 세상에는 악마적인 행위와 짐승과 같은 행위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대 안에서 살아갑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처세이고 심지어 선을 베푸는 이들을 넘어뜨려서 그것을 악용하고 사기를 치고 과부의 가산을 집어삼키는 일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선을 이기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바보나 하는 일로, 자기 밥그릇도 못챙겨먹는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세상의 기준과 다른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서 바울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라고 말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 보통 원수가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면 그것을 지켜보면서 통쾌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절대적으로 선을 행해야만 한다. 할 수 있는대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가장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본문 1절에 기록된대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께 피하였으니 나를 구원해 달라는 이 다윗의 고백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굶주린 사자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 사자를 만난다면 두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 피한다는 이 고백은 내가 너무나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혹은 사자가 너무나 무섭고 떨리는 존재이기 때문 이라기보다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고백을 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의 삶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이 고백한 내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라는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이 말씀은 단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공격을 받더라도 대응하지 말고, 무조건 착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윗이 주님께 피하며 주님의 구원만을 바라는 이 고백은 주님만을 의탁하며, 그 뜻에 순종하기로 결심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라는 말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식이 선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분노를 억지로 누르면서 속으로는 마음껏 분노하고 칼을 갈지만 안 그런척 거짓 미소를 띄우고 참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피한다라는 뜻은 악한 마귀가 나를 공격할 때, 내가 주체가 되어 그 전쟁을 내가 치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등 뒤에 서고 그 상황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드러나시도록 나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억울함과 괴로움이 나를 짓누를 때, 이유없는 고난이 몰려올 때, 주님을 믿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핍박이 찾아올 때,내 마음에 상처를 주고 모함하며 따돌림을 받을 때, 이 모든 것들이 사자와 같이 내가 달려들어 내 영혼을 찢고 뜯어내려고 할 때, 우리는 주님께 피하며 주님의 구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이 마귀의 공격에 넘어가 난도질 당하지 아니하도록 사자의 벌린 입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과 용서와 자비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죠.
세상이 보기에는 패배한 것처럼 보여도, 진것 처럼 보여도 주님의 뜻대로 용서와 사랑으로 품어내고 그 영혼을 지킨 인생은 구원과 참된 승리를 맛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마귀를 대적하는 믿음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싸우실 것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강한 능력의 팔로 우리를 안으시며 우리를 높은 반석 위에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께 피하길 원합니다. 우리를 쫓아오는 모든 대적들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비록 그들이 사자와 같이 우리의 삶을, 우리의 영혼을 공격하며 찢으려하고 넘어뜨리려하고 멸망시키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과 진리를 쫓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주님께 피할 때, 우리를 승리케 하시고 자유케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오니 주님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인도하심이 주님께 피하며 그 구원을 간절히 바라며, 진리 안에서 승리하기를 소망하는 모든 믿음의 심령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