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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시편 3편

by 터틀곽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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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모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위기를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작은 위기도 있고 큰 위기도 있죠.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에 닥쳐올 위기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간신히 위기를 극복했다. 라고 생각하고 안정을 찾아갈 때 즈음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일생에 그러한 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사자성어도 있죠. 첩첩산중, 설상가상, 갈수록 태산, 엎친대 덮친격, 이라는 속담들도 있습니다.

 

재밌는 넌센스 퀴즈 하나 낼까요?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의 이름을 아십니까? 도끼로 이마까 입니다. 이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있는데요. 누군지 아세요? 깐데 또까 입니다. 더 무서운 사람은 안깐데만 골라까 라고 하더라고요. 재밌자고 한 농담이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깐데 또까고, 안깐데만 골라까는 그런 아픈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1편과 2편이 시편 전체의 서문을 담고 있던 책이라면 시편 3편은 개인적인 탄원으로 시작하는 첫번째 탄원시 입니다. 탄원시는 말 그대로 탄원하는 것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사정을 하소연하여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중에서 시편 3편과 4편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의 처음 시중 13개의 시편이 대게 전쟁, 혹은 아들의 반역과 가족 간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처럼 다윗도 참 많은 위기의 순간을 지나쳐간 인물인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오늘의 본문 1절에서 여호와여! 라는 이름을 부르며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에 근거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시를 지을 때 다윗의 상황이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막 빠져나온 때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해설 성경에 보면 시편의 주제가 적혀있는 성경들이 있는데요. 3장 위에 보면 작게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시)라고 기록되어진 성경도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일생 중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바로 압살롬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을 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본문 1절과 2절을 살펴보면 다윗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탄식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많다’ 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모두 대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는데요. 다윗의 현재 상황이 많은 대적에게 둘러쌓여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그 대적이 잠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금 다윗 앞에 나타나 적극적으로 다윗을 대적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윗을 향하여 어떻게 조롱하고 있습니까? 2절에 기록되어 있죠.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원어대로 직역하자면 하나님에게는 그를 위한 구원이 없다 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요.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혹은 하나님은 그를 구원할 능력이 없다. 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을 대적하는 그들은 다윗이 믿는 하나님을 향하여 무능한 하나님, 무심한 하나님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죠. 

 

때로는 우리가 만나는 위기상황 앞에서 하나님께서 잠잠하시다고 느꼈던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는 응답을 동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거나 어려움이 비껴가거나 내가 생각하는대로 상황이 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응답하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대적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왜 나를 구원하시지 않으시는가? 왜 나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는 것이죠.

 

왜 우리는 그러한 오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기도와 응답이라는 관점이 지극히 문제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동반한 문제가 등장하고 그 문제가 이전의 방식대로 해결되지 않을 때, 다시 말하자면 내가 익숙한 삶의 방식과 일상대로 돌이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해 실망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고난과 역경속에 몰아넣기도 하시고, 그것들을 감내하게 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그 연단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는 거죠.

 

하지만 평안함과 안정감을 원하는 인생들에게는 갑작스래 닥쳐오는 고난이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2절과 같이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마져도 구원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잠잠하심을 탓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후 3절의 다윗의 고백을 주목하여 보기를 원하는데요. 다윗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세가지 단어로 찬양하고 있는데요. 첫번째로는 주님은 나의 방패이심을, 두번째로는 나의 영광이심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방패라고 하는 것은 전쟁에 쓰이는 물건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던 인물이었기에 이 방패의 중요성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방패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방패는 보통 큰 방패와 작은 방패로 나뉘는데요. 작은 방패는 주로 무기를 든 자가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중세시대 영화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한 손으로는 휘두를 수 있는 칼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방패를 들었죠. 그리고 큰 방패는 온 몸을 방어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이 방패는 거의 전신을 다 가리는 방패로 전술적으로는 부대 단위가 진격할 때 날아오는 화살이나 바위를 방어하는 용도로 썼던 것이 큰 방패 입니다 .이 방패는 동서남북 사면을 방어할 수 있는 방패라고 하는데요. 이 방패를 들고 전진하면서 적군을 향해 담대하게 걸어 나가는 것이죠. 

 

주님을 방패라고 고백한 것은 이러한 위기의 상황속에서도 주님만이 나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지략과 동맹군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다윗은 가장 먼저 주님는 나의 방패임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과 지지를 주님께 두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두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영광이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처지가 어떠한 처지인가요? 반역을 당하여 왕위에서 쫓겨나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한 처지 아닌가요? 사무엘 하를 보면 시므이라는 인물이 다윗이 쫓겨가고 있을때에 다윗에게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은 나의 영광이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처지와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것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고 이끄셨던 하나님께 대하여 당신이 나의 영광이심을 나의 힘이시며 능력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세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데요. 머리를 들게하다 라는 의미는 이전의 지위를 회복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나 혹은 죄의 혐의를 벗고 명예를 회복한 상황에서 머리를 든다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머리를 드는 경우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겨진 때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다윗의 상황과 형편은 아직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제 그 고난의 여정의 시작점에 있습니다. 이제 막 쫓겨났으며 언제쯤 회복이 될지 상황이 나아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그 상황이 악화되고 더 안좋아질 수도 있는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현재 사정과 형편을 두고 그 상황에 맞추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두운 시절을 지나는 즈음 그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피난처이심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고백의 요약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4절의 말씀입니다.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히브리어로 이 구절은 미완료형과 연속법으로 쓰여져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현대로 옮길때는 과거형으로 쓸 수도 있고, 현재형으로 쓸 수도 있고, 미래형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해석할 때는 다윗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응답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응답하실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이후 5절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이 5절의 고백이 흐름상 맞는 흐름인가? 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절과 2절에서는 내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탄원을 올리고 있고. 3절과 4절에서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노래하며 계속해서 그 믿음을 하나님께 두리라는 고백을 드립니다. 

 

그런데 5절에와서는 내가 누워서 자고 또 일어나니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주셨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잠을 자고 일어났다 라는 것이 이 시의 고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 잠들고 깨는 것, 어찌보면 우리 일상에서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끼는 것 아닌가요? 저녁이 되면 자연스레 잠들고, 또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 그저 매일 같이 일어나는 일상입니다. 그런데 그 일상이 어떤 이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고백도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당연한듯 보이는 일상에 대한 감사입니다. 자연스럽게 잠들고 일어나는 그 일상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고백하는 것이죠.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셨기 때문에 내가 누워 자고 깰 수 있었다 라는 고백이죠. 

 

두 번째로는 일반적으로는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지만, 어떤이에게는 잠들고 깨는 것이 일반적인 일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 다윗의 상황도 그러하죠.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자의 신세에 있는 다윗은 풍전등화의 상황이었습니다. 당장에라도 압살롬이 군사를 보내어 추격하기 시작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다윗이 밤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겠습니까? 아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오히려 다윗의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불안하고 떨리겠습니까? 그렇기에 다윗은 이 고백을 통해서 나의 잠듬과 또 깨어남이 하나님께서 붙드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이후 6절도 같은 고백입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이 고백 또한 다윗의 상황이 그러하기 때문에 드린 고백이 아닙니다. 천만인이 에워싸 진친다고 했을 때 안정감을 누리려면 어떤 상황이어야 안전할까요? 천만인 천만인의 열배인 1억명이 있으면 안정감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이 그러한 상황입니까? 그와 함께한 이들은 피난 길에 오른 쫓기는 신세에 그를 따르는 연약한 백성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5절에 내가 누워 자고 깰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듯이, 내가 잠든 사이에 천만인이 나를 애워싼들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과 신앙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고백이죠.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신앙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는 은혜의 여정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극적인 간증을 통해서 은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러한 극적인 상황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감격하는 것이죠.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극적이지 아니한 아주 일반적인 일상을 허락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누군가 저에게 큰 병에서 치료해준다던지, 극심한 고난과 고통속에서 기가막힌 방법으로 건져주시는 것을 경험시켜 주겠다고 한다면 괜찮다고 거절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러한 은혜를 받은것도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혜이지만 나의 일상을 평안함 가운데 큰 파도 없이 이끄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이 더 큰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감사가 없는 하루를 살아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주어진 일상이 당연한 것으로 살아갈 때가 많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오늘 이 다윗의 고백을 기억해보십시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라는 이 고백을 통해 나의 일상을 통해 얼마나 놀랍고도 큰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지를 깨달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7절과 8절의 고백을 통해 다윗은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라는 고백은 법궤가 진 안으로 들어올 때 외치던 함성이라고 합니다. 법궤가 이동하게 되면 전쟁이 시작되고 전쟁의 용사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면 전쟁은 승리합니다. 저번주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2편의 말씀처럼 철창을 가지신 주님께서 다른 이방 나라들을 질그릇을 깨심같이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진 안에 들어오는 이 함성을 고백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실 것이며, 나의 원수를 물리치시라는 고백을 올리고 있습니다. 

 

뺨을 친다는 것과 이를 꺾는 다는 것은 모욕적인 행위를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에게 모욕을 주었던 원수들을 향하여 그들의 뺨을 치실이가 하나님이심을, 그들의 이를 꺾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실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는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수를 갚고 싶어 합니다. 내가 당한대로 그대로 내가 갚아주어야 속이 시원합니다. 누가 내 뺨을 한대 쳤으면 적어도 두대 세대는 때려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로 하여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 내가 갚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삶의 방식이며 새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나의 옛 자아가 죽고 새사람을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삶의 고백이 이 같은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오라가족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요?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 앞에서 내가 의지하는 분은 누구인가요? 입술로는 나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정말 그러한가요? 우리의 신앙이 타성에 젖지 않길 원합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의 선택과 결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도록 날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삶의 저변을 돌아보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나의 구원이십니다. 

많은 이가 나를 대적하여 넘어지게 할지라도 주님만이 나의 방패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날마다 나를 붙드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음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과 성령하나님의 감화하시고 감동하심이 성삼위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믿음의 식구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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