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편 (2)
저번주에 청년다니엘 기도회가 있었는데요. 참 많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수요일날에 박광리 목사님께서 설교하셨던 검으나 아름답다라는 설교가 참 인상깊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도 몇번이나 박광리 목사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요. 다른 분들도 그때 받으셨던 은혜를 많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물론 저도 많은 은혜를 받았고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한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수요일에 시편 강해를 이어오고 있었는데요. 그중에 오늘의 본문인 시편 7편의 내용을 강해하기 위해서 설교의 틀을 어느정도 잡아놓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박광리 목사님의 검으나 아름답다라는 메시지가 좀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요일에 다니엘 기도회가 끝나고 아내와 함께 집에 걸어가면서 아내에게 여보 내가 준비한 시편 설교는 하면 안될 것 같아. 라고 말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계속 고민을 하다가 결국에는 그냥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해석의 원리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은혜 뿐만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또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번시간에 시편 7편의 1절과 2절을 함께 묵상하였는데요. 기억이 나시나요?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잘 기억이 안나시죠? 당연한거에요. 사실 저도 설교문을 작성하지만 그 모든 내용을 제가 다 기억하고 암기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잠시 복습을 하자면요. 이 시편 7편은 탄원시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다윗의 식가욘으로서 이 시편은 가변곡으로 구분된 노래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계속 급변하는 그런 곡조에 맞추어진 노래시였던 것이죠.
또한 이 시편이 기록된 배경은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이 구시라는 인물이 베냐민 사람으로서 사울이나, 혹은 사울의 친척이었던 시므이나, 혹은 사울에게 다윗을 고발하였던 어떤 베냐민 사람중 하나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처한 상황이 사자가 나를 뜯는것 같은 그러한 위기속에 있어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주님께 피하고자 하려는 다윗의 고백이 들어있었다는 말씀을 4월 둘째 주에 함께 나누었었습니다.
오늘은 1절과 2절 이후의 말씀인 3절부터 마지막 구절의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3절 이후 5절의 말씀을 보면 다윗의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셀라)
3절에서 말하는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라는 문장은 그 뒤에 기록되어진 일들을 대변하는 문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결단코 이와같은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삶의 여정을 하나님께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거나 대적에게서 까닭없이 빼앗은 일이 결단코 없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자신은 결단코 그 일을 행하지 않았음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하고 있는 것이죠.
저번 시편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다윗은 얼마든지 자신을 음해하려는 세력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을 처단하고 자신의 왕권을 더욱 굳건히 할 수있는 힘과 권세가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노리는 원수와 같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목숨을 건져 주었던 일들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죠.
사람은 양심에서 자유로운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인인 윤동주의 서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 시를 대하면서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하늘.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신적존재, 곧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적자면 하나님 앞에서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혹시나 누가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죠. 저는 윤동주의 서시와 오늘의 본문인 이 시편 7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의 삶의 모습과 지금 현대 기독교의 모습을 함께 오버랩하여 보았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의 태동을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는 과정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70년도 80년도만 해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되었던 것이죠. 그만큼 그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코람데오 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살기 위해 엄청 애를 쓰던 믿음의 선진들의 노력으로 인해서 이 땅에 기독교가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작금의 기독교회를 살펴보면 그러한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복음과 교회가 힘을 잃어버린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너무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현대 기독교 안에서 내가 받아야 하는 사랑과 내가 받을 용서와 내가 받아야 할 이해는 강조되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순결함, 정결함, 거룩함,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왠지 주류신학이 아닌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 우리는 부족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삼아주셨다. 라는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와 상처받은 영혼은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와 같은 치유와 회복에 더 많이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하심의 성품과 속성이 덜 중요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최상위에 있는 것이라고도 믿습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용서 없이는 우리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신자의 순결함과 정결함, 그리고 거룩함과 하나님을 경외함도 그와 못지않게 한 사람의 신앙을 성숙시켜가는데 무엇보다 우선되고 기초가 되어야 하지만 이 사랑에 너무 집중되어진 나머지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의 모습이 많이 축소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에서 비춰지는 교회의 현상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현대사회의 교회는 정직과 순수함을 잃어버린 이기적인 집단으로 보여질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것을 악용하고 부풀리는 세상의 방법도 나쁜것이지만 세속적이고 세상의 기준에 얽매어있는 교회들이 그런 빌미를 계속해서 내어주기 때문에 이런 문제점이 자꾸 드러나는 것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세상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오지만, 세상에서 살아갈 때는 세상 사람들과 거의 똑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연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연민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요.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돈을 사랑할 수 밖에 없어요.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자존감이 낮을 수 밖에 없어요. 나는 빽이 없고 연줄을 댈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방법을 의지할 수 밖에 없어요. 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 손에 죄악이 없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은 적이 없습니다. 대적에서서 무엇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은 실수가 있었고 하나님 앞에 범죄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범죄한 이후 늘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밤새도록 울며 애통해하였던 것이죠. 다윗이 이렇게 애통하며 자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다윗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 사랑하기에 힘썼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다윗이 왕이 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어떠하심을 깊이 깨닫고 체험했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경험한 두려움과 떨림 앞에서 다윗은 오늘의 본문과 같은 고백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자신의 행위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토로 하고 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며 복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 이신칭의와 중생의 교리로서는 다윗의 이러한 고백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율법의 시대를 살아가던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을 주신 이가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그 율법을 성실하게 이행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을 삶으로 나타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5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만약 3절과 4절의 내용과 같은 일을 내가 했었더라면, 내 원수에게 잡혀서 내 생명이 끝나고 내 영광이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그만큼 다윗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성결하였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삶의 자세를 기억하면서 나의 삶의 여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품위와 품격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삶에서 드러나는 삶의 태도와, 또 나의 말과 행위가 그와 동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양심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9절의 기록인데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에 부어주신 양심을 지켜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몰래 악을 행하면서도 속일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번째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요, 또 다른 하나는 나 자신 스스로를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 맞아서 마귀에게 붙들려 완전한 타락과 파괴적인 정서 안에서 살아가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자녀는 범죄 하거나, 육신의 정욕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마다 양심이 소리치는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죠. 다윗은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여호와여 나의 의와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셨던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서 우리의 삶의 행위와 마음의 품은 생각과 욕망의 모습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진을 한번 본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것이 디케의 저울 이라는 것인데요. 여기서 나오는 디케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테미스의 딸인 여신 중 하나입니다. 정의의 여신으로 불리우는게 이 디케죠. 그런데 이 디케를 보면 눈을 가리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판결과 심판을 내릴 때, 영향을 받지 않겠다라는 의미 입니다.
가장 공평하고 객관적이며 정의롭게 재판해야 하기 때문에 두 눈을 가리고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심판하겠다는 의미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공정과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죠. 헌법이 만들어진 이유는 법을 기준으로하여 모두에게 공평한 잣대를 적용시키기 위함인데, 그 법과 질서는 제대로 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실 것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은 한국사회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고요. 전관예우라던지 봐주기 수사라던지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젓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공평과 정의가 사람의 손으로 세워질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만의 문제는 아니겠죠. 힘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당연한듯이 시행되는 일 일것입니다.
이렇듯이 이 세상에서는 심판이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억울한 일이 발생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공의와 정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고 완전한 의의 하나님이신데,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죠.
왜 그럴까요? 인간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하지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그날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바르게 세워질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자신의 삶을 살아온대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비록 현세에서는 공의가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그날이 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의 본문 11절부터 13절에도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악을 행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공평으로 이루어질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본문을 보면 이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 인해 혹여나 내가 죄를 짓지 않았을까? 내가 지은 죄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를 생각하면서 다가올 심판을 날마다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두려움 가운데 살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입니다. 우리는 검지만 아름답다고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제사의 제도를 주셨고, 우리에게는 그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어주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자녀라 여겨주셨습니다.
자녀됨은 용서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용서는 일회적인 용서가 아니라 영원한 용서를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전에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모든 죄 까지도 용서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신자로서 바른 신앙을 이루어 나가는 삶은 자신이 용서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아래에서 방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된 자유와 기쁨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가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녀삼아주시고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주셨음을 깨닫는 것이죠.
이 은혜를 깊이 깨달을 수록 우리의 삶의 자세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으로 성화되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아가며 나에게 베푸신 은혜의 깊이를 체험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나의 삶을 조정하고, 이 세상의 가치에 정복되지 아니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오라가족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드릴 삶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열매는 무엇일까요? 미가서 6장 8절의 말씀을 봉독해 드림으로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공동번역으로 한번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 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잠잠히 거룩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를 행하며,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정의를 실천하며, 은혜에 보답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며 삶의 모든 태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모든 심령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