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복있는 사람은
시편 1편 1~6
오늘 함께 은혜를 나누실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편입니다. 이 시편은 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어떤 개인 특별히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이 겪었던 여러 상황을 인간의 감정을 담아 문학적으로만 쓴 시는 아닙니다. 물론 시편 안에는 기도와 찬양 묵상의 모음이 포함되기에 성경안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율법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동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의 본문인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는 시 입니다. 시편의 시작을 기도문이나 찬송으로 시작하지 않고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 좀 특별한 점이죠. 곧 다시말하면 시편 전체가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참되고 복된 삶은 무엇인지를 시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성상 시편 1편은 히브리어의 첫 자음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자음으로 끝을 맺는 문학적 기법을 가지고 있는데요. 마치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듯 인생 전체를 담아내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시편 1편은 명확한 두 가지 구도를 가지고 있는데요. 먼저는 복 있는 사람이고 두번째는 악인입니다. 이 두가지 구도를 명확하게 구분지음으로 인해서 마치 독자들을 향해서 어떤 길로 걸어가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먼저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시인은 복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복있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세가지로 구분하여 가장 먼저 1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왜 시인은 가장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였을까요?
그래도 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긍정적 의미를 가진 단어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2절을 가장 먼저 올려보내서 복있는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율법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다. 라고 시작하는 것이 더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시작이 아닐까요?
그런데 시인은 복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가장 먼저 복있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자세에 대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인간이 가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시인이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이 가진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 육신의 정욕을 따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자기 마음에 좋은대로 행하고자 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적 타락이라고도 하죠. 그렇게 타락한 인생의 마음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악을 향하여 달려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욱 가깝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인은 악인의 꾀를 좆지말 것, 그리고 죄인의 길에 서지 말 것,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구문을 보면 사람이 취하는 행동 양식이 나타나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좆다, 서 있다. 앉다 라는 구분이죠. 이 동사는 광야와 사막의 두 갈래 길에서 항상 선택을 해야 하는 유목민에게는 더욱 실감나게 다가갈 수 있는 어구 입니다.
나는 어느 길로 걸어갈 것인가?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머물러야 할 곳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이 항상 이동해야 하며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유목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깊이있게 다가오는 말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죠.
유목민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항상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삶에서는 양자택일 뿐만 아니라 여러 선택의 기로 앞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때 우리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 모든 일이 의인의 길인지, 악인의 길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 선택이 내가 오늘 도둑질을 할거야. 내가 오늘 사람을 폭행할거야. 내가 오늘은 남을 업신 여기면서 오만방자하게 행할거야. 라는 결정으로 인해 악인이되며 죄인이 되며 오만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생각보다 악하지 아니하며, 다른 형태로 보았을 때는 아주 젠틀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여기계신 그 어느 누구가 악을 행하기 위하여 고민하고 고심하는 분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정욕과 교만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우리의 본성이 우리를 교묘하게 속이면서 악인의 길로 조금씩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이 등불이 되어 우리의 삶을 바르게 비추지 않는다면 육신의 즐거움과 정욕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고 만족하는 삶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깨어있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선택하고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요. 1절의 복있는 사람은 단수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요. 악인들의 모습은 복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있는 자, 곧 의인인 신자가 깨어있지 아니하면 절대 다수가 가지고 있는 세력의 악함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 말씀을 머리속으로 상상해보며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여정 가운데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죠.
이 그림은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또 이 그림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죠? 바로 올레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마치 천로역정의 길을 걸어가는 주인공인 크리스챤 처럼요.
그 길의 한편에는 악인들이 모여 회의를 합니다. 오늘은 누구를 넘어뜨리고 그를 폭행하고 가진 것을 빼앗아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할까? 라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을 피해 걸어가다 보니 죄인들의 무리가 모여 순례의 길을 걷는 이를 손짓하여 부릅니다. 우리와 함께 있으면 든든할거야. 만약 너가 우리가 가진 이 힘에 동참하지 않으면 너는 큰 화를 당하게 될거야 라고 말하며 겁박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간신히 그들을 피해갔더니 이번에는 오만하고 거만한 무리들이 모여서 순례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무시하며 히히덕거리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어느 길을 보아도 이같은 무리가 득실거리는 상황이 내 앞에 놓여있고, 나는 어떻게든 이 길을 지나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떼를 지어 내 앞을 가로막고 나를 둘러싸며 어떻게든 나를 방해하고 넘어뜨리고 자기들과 같이 만들려 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그 길이 두렵고 떨리고 피하고 싶겠습니까?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믿음의 길이 바로 이와 같은 여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방황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시인은 바로 그 뒤인 2절에 복있는 사람이, 의인이 걸어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죠.
영어 성경에서는 2절의 시작을 But 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는 뜻이죠. 먼저 악인들의 행동양식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다음 복있는 사람, 의인이 걸어가야 할 길을 그러나 라는 단어를 쓰면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는 알 수 있듯이 시인도 이 세상의 여정의 그러함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러나 의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다. 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죠.
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절에는 복있는 사람이 행해야 할 적극적인 의무 사항을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즐거워하는것,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의인은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토라 라고 하는 모세 오경이 율법을 지칭하는 성경인데요. 이 율법은 두가지 명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라’ 라고 하는 적극적인 명령과 ‘하지말라’ 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하라 라는 적극적 명령보다. 하지 말라 라고 하는 소극적인 명령에 더 집중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들어 도둑질하지 말라 라고 하는 것은 소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탐심을 버리고 우리가 가진 것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제하라 라는 명령보다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 명령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소극적인 명령에 집중할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은 율법이 가지고 있는 적극적 명령과 소극적 명령 이 두가지 명령 모두를 즐거워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 입니다.
두 가지 명령 중 한가지 명령만 준행하는 사람은 말씀에 담긴 깊이와 진의를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마치 두 날개로 힘차게 날아올라야 하는데 한쪽 날개는 크지만 다른 쪽 날개는 작아서 비정상적인 형태로 날지 못하는 새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말씀에 담긴 깊은 진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모든 말씀을 즐거이 따르는 것이 복된 삶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두번째로는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이 묵상하다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예헤게라고 하는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묵상의 이미지는 어떠한가요? 조용한 시간에 홀로 성경책을 들고 앉아서 창가로 비춰오는 한줄기 햇빛을 받으며 그 빛이 성경을 비춰주면서 그 말씀을 읽고 두 눈을 감고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기 위해서 잠잠히 기도하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한 시간을 묵상이라는 이미지로 생각하실것 같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묵상의 이미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 예헤게라는 단어는 조금 자세하게 말하면 사자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 혹은 비둘기가 구구구 하며 구슬프게 우는 소리를 쓸데 이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단어를 보면 묵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특정시간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바른 자세로 또박또박 말씀을 읽는 모습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곧 주야로 이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중얼거리다 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모습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면서 생활하는 것이 예게헤를 더 잘 표현하는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각자가 처한 곳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소리를 내어 그 말씀을 낮이나 밤이나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복있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의 대부분은 이 말씀을 암송하고 읊조리는 삶을 살아가기보다 다른 많은 것들에 시간을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특히 스마트폰이 우리의 손에 쥐어진 그 이후부터 정말 대부분의 시간을 스마트폰과 함께 보내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자화상이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율법을 즐거워 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3절에서는 그 복있는 사람이 누리게 되는 평안함과 안정감에 대한 말씀이죠. 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마르지 않습니다. 가뭄이 들어 오랜시간 비가 내리지 않아도 물가에 심기워진 나무는 물가에 깊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시냇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말씀과 사랑과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 땅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를 염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곁에 믿음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메마름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지 않는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샘물 곁 시냇가에 뿌리내린 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열매를 맺어야 할 때 반드시 그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품 안에서 안식하며 평안을 누리는 이들은 삶에서 그리스도의 열매를,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입술로는 나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때를 따라 열매를 맺고 있지 아니하다면 내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4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악인들의 모습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요. 특히 4절은 3절에 기록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반대되는 강한 대조문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시냇가에 심겨진 복있는 사람 곧 의인과 악인들의 궁국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펴보면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며.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는데요. 무엇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3절에 기록된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가 누리는 평안과 형통함을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이죠. 복있는 사람은 마르지 않는 시냇가에 깊이 뿌리를 내려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지만 악인들은 뿌리가 없어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아서 바람이 이리불면 이쪽으로 저리불면 저쪽으로 날아다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중심이 없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인생이라는 것이죠.
그러한 악인들의 삶의 끝을 5절과 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악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자기의 꾀와 욕심과 정욕에 빠져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이리저리 살아가지만 결국에는 그들이 받을 심판을 피할 수 없어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죠.
특히 이 6절의 말씀은 시편 1편의 전체적인 요약이며 주제이며 결론과도 같습니다. 특히 시편 1편에서 첫단어라고 할 수 있는 복있는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글자인 알렙으로 시작하고 있고요. 마지막 6절의 망하리로다의 마지막 단어는 히브리어의 끝 자음인 타브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 1편의 말씀은 사람이 걸어가야 할 인생길의 처음과 끝 시작과 결말의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 본 시편을 통해 삶의 형태와 나의 선택과 결정이 나의 인생의 결과를 결정하게 된다는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 인생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시편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소망의 말씀입니다. 의인은 번성하게 되고 풍요롭게 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은 결국 자신의 욕심을 따라 멸망과 심판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때때로 자신의 삶에서 시련과 고통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앞에 닥쳐오는 시련 앞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며 죄인의 길로 돌아가며, 오만한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은 결국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지만. 하지만 그 시련 앞에서도 약속의 말씀에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이들이 복있는 사람의 반차를 따를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오라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가 복있는 사람이 됩시다. 옆에 계신분을 이렇게 축복합시다. 당신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이 찬양을 함께 묵상합시다. 복있는 사람 이라는 찬양인데요. 조용히 묵상하시면서 우리 모두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찬양을 함께 나누시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시편 1편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복있는 사람과 악인들의 삶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보았습니다. 바라옵기는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채워지게 도와주셔서 이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여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시냇물 샘가에 심기워져 때를 따라 열매를 맺어 주 안에서 형통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악인들의 길을 떠나 그들의 꾀에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오만하고 거만한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동하시고 감화하심이 마르지 아니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샘물을 마시며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며 즐거워함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모든 믿음의 식구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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