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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이방인의 사도 바울

by 터틀곽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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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사도 바울

사도행전 22:17~29
찬송가 292 주 없이 살 수 없네

우리가 어제의 본문을 통해서 보았듯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간증을 유대인들에게 전했던 본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늘의 본문 또한 바울의 간증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16절에 바울이 아나니아를 만나서 이제 주저하지 말고 일어나 침례를 받고 죄씻음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고 난 이후의 내용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일어나 침례를 받고 죄씻음을 받으라는 명령은 새사람을 입으라는 명령입니다.

이제 예전의 신념과 가치관을 버리고 부활의 주를 증거하기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때 환상중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요. 그 음성은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갈 것을 명령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은 너의 복음 전도를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물론 지금은 예루살렘에 있지만 하나님의 시기가 차기 전까지는 떠나있으라는 음성을 듣게되죠.

그러자 바울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자신이 이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찾아가서 그들을 잡아 옥에 넘기고 때리고 하는 일에 앞장서던 사람이었고,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에 그 일을 찬성하고 증인으로서 그들의 옷을 지키던 자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깊은 회심 가운데서 나오는 회개의 고백으로 볼 수 있습니다. 회개의 시작은 예수님을 믿기 전 자신의 과오와 그릇된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는 회심과 죄에 대해서 깊이 다루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들이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거듭난 사람의 필수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에서는 회개를 촉구하거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듣기 좋은 기복적인 신앙이나 젠틀하고 인문학적이거나 인간론에 치중한 설교나 가르침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과 용서와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영생에 대한 메시지가 소망과 희망의 메시지인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꼭 필요한 말씀들이죠.

하지만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을 입기 전 죄의 종의 모습으로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 속아서 살아왔던 그 옛사람의 모습을 반드시 직시하고 그 옛사람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경성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별된 사람으로서 죄를 멀리하고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세상과 짝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죠..

또한 죄악가운데 머물고자 하는 나의 옛사람의 습성들을 파악해서 그것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고 새사람의 능력으로 살아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죄를 떠난 생활 만을 위해서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에 매여서 율법에 종노릇 하는 사람이 되는 어리석음은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할 수 있는것이 율법을 잘 지키는 행위를 추구함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안식과 안정을 누리려고 하는 종교성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술도 안마시고, 담배도 안피우고, 세상 사람들처럼 쾌락과 향락에 빠져 살지도 않고,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하지 않고 스스로 잘 살고 있다는 교만함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은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에서 벗어나 겉모습과 행위만 잘 꾸미려고 하는 회칠한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모습만으로는 참된 회개와 진리가운데로 다다를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참된 회개의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앞에서 나의 잘잘못을 비추는 것과는 다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비춰지는 것을 경험하고, 또 믿음 안에서 거듭남으로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아래서 거룩한 신앙 양심 앞에 마주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의 바울도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누구보다 종교적인 열심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이들을 죽이고 때리고 핍박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이 성령 안에서 조명되어는 과정을 통해서 바울이 처음에는 자신을 사도로 소개하였다가 나중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자신의 죄악된 삶 대해서 마음 아파 하였는지를 드러내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실을 피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모든 과거와 그 행위들을 자기 앞에 모여있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겸허하고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러한 솔직한 고백 앞에서도 유대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시 소리지르며 바울과 같은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 살려두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며 다시금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진리가 선포되었다고 만사 오케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얼마나 능력이 많은 사도였습니까? 그들이 찬송할 때 옥문도 열리고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청년도 살렸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였고 모든 율법에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문화인이었고 교양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바울이 지금 시대에 와서 교회를 세운다면 정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들겠습니까? 금새 민족 복음화를 이루고 나아가서 세계 선교도 바울과 함께라면 정말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바울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온다고 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음에도 사람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마 바울이 아니라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신다고 하여도 여전히 믿지 않기로 작정한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행전을 묵상하면서 이미 알고 있지만, 바울이 정말 진심을 다해 전했던 복음에 반응하여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사람도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그 복음을 듣고난 이후 어찌할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가 자신의 어두움을 드러내고 자기의 신념에 반대되는 말이라 생각하면서 오히려 바울을 죽이려고 눈이 혈안이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가령 회개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되었을 때, 어떤 이는 그 말씀을 받아서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결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가벼이 여기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내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간증을 통해서 바울 자신이 복음을 만나기전에 자신이 어떤 죄악된 삶을 살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또 그 복음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고백하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기 전의 모습, 옛사람이 가졌던 그 생각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때로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추억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옛사람의 모습이 다시 살아나서 새사람의 삶의 방식에서 나를 끌어내려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만들려 하는 사탄의 방해와 모략이 있음을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듯이, 영적인 전쟁도 어떤 것이 옛사람의 삶의 방식인지,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나의 가치는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을 즐거워하고 추억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때로는 나를 훈계하고 책망하는 말씀이 되어서 내가 다시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돌이키는 말씀이 들려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이 그것을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거듭난 나의 모습을 실제로 사랑하고 그 삶을 기뻐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합시다. 성령 하나님 예수님을 알기 전 죄악과 무지 안에 살았던 지난 날을 회개케 하시고 용서하시어 우리를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옛사람의 삶의 방식을 추억하거나 그 가치에 물들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하여 주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온전히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이 우리를 교훈케 하시며 때로는 책망케 하여 주셔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시고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시다.

공동기도제목으로는 구교회 매매를 위해 김영재 담임목사님을 위해 사고 이후 수술과 회복중에 있는 김시우 김한솔 부부와 자녀들을 위해, 윤장욱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각자 개인 기도제목을 가지고도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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