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시는 하나님
오늘의 본문은 엘리후가 욥을 향하여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엘리후는 크게 3가지 담론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14절에서 18절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꿈과 환상을 통해서 사람에게 말씀하여 주신다.
두 번째로는 19절에서 22절에는 혹은 질병을 통하여서 말씀해주신다.
세 번째로는 23절부터 30절까지인데요. 중보자를 통해 회복을 약속하여 주심입니다.
엘리후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어제의 본문인 33장 8절에서 1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여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욥을 못마땅하게 여김으로 자신의 지혜를 통해 욥을 설득하겠다는 의미로 이 담론을 시작한 것입니다.
첫 번째 주장에서는 사람에게 말씀하실 때 꿈과 환상을 통해 경고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꿈과 환상을 통해서 계시된 말씀이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꿈과 환상을 통해 어떤 신비한 체험과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다. 주로 개꿈을 많이 꾸고, 꿈이라는 것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꿈을 꾸면서 이것이 환상이고 계시이다. 라고 명확하게 객관성을 가지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꿈을 꾸는 가운데에서 신앙생활과 연결되어지는, 혹은 말씀과 연결되어지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꿈이 신앙과 말씀으로 연결되어지는 과정은 해석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저는 해석의 과정을 거치고, 그것을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해석하고 입증하는 단계를 거치면서 하나님이 이러한 마음을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고 삶 속에 적용하기도 합니다만 사실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신앙생활을 좌지우지 하거나 진리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 마냥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여져 있으며 모든 꿈과 환상과 계시는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록된 말씀을 통해, 또 공동체를 통해서 해석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환상과 신비주의에 깊이 심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깊이를 깊이 묵상하기를 버리고 신비적인 현상과 실체가 없이 현혹하게 하는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게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다가오시지만, 그 모든 과정은 반드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영적인 질서를 헤치지 않으며 공동체를 세워가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엘리후는 사람이 병상의 고통과 뼈가 쑤시는 징계를 받기도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현재 겪고있는 육체적인 질병을 빗대어 이야기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질병이 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하나님을 가까이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육체의 질병은 여러 가지 현상가운데 나타납니다.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어떤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통해 생겨날 수도 있고 그 원인은 인간이 다 찾아내지 못할뿐더러 어떻게 그런 질병이 생겼는지 확인할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질병가운데 놓이게 되었을 때 그 모든 현상이 하나님의 징계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다녔던 서울의 어떤 교회는 작은 감기만 걸려도 회개하기에 바빴습니다. 아니면 내 육신을 공격하는 귀신이나 마귀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쫒아내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심지어는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치료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병을 키워서 나중엔 정말 손쓸수 없을 정도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또한 올바른 신앙이 아니죠. 예수님께서도 병든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질병이라는 질고나, 어떤 고난과 역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그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병이 찾아 오는 것, 고난을 만나게 되는 것,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 고독과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가는 것,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그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하고 바라보아야 할 것은 왜 나에게 이러한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왔지? 라고 하는 그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넘어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을 앙망하는 삶을 통해 믿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때때로 훈계하기도 합니다만 그 훈계의 목적이 고통을 주고 아픔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훈계를 통해서 자녀들이 잘못을 깨닫고 그릇된 삶이나 행위를 고치고 온전한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어떤 질병이나 고통과 고난 그 자체에 의미를 두려고 하기보단 그 상황들 가운데에 함께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찾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시련과 고통과 질병을 내려주셨습니까? 라고 하는 물음보다. 지금 이 고통중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과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과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중보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23절~24절에서는 천사 중 하나가 그 고통당하는 자의 중보자로 함께 있으면 그의 정당함을 변호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고 대속물을 얻었다 라고 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변호하면서 중보자를 구하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16장 19절에는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라고 기록되었듯이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해줄 수 있는 중보자를 찾고 있었는데요. 엘리후는 이 주장을 통해서 만약에 욥 당신이 의로웠다면 정말 의로웠다면 하나님께서는 천사중에 한 천사를 보내어 너의 정당함을 입증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중보자의 말을 들으시고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고 오히려 회복의 은혜를 누렸을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죠.
많은 학자들은 이 내용을 통해 대속물이라는 이 단어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만, 물론 구약의 많은 내용이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상으로 살펴보면 결국 엘리후는 욥이 의롭지 아니함을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는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욥이 의로웠다면 25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나타나듯이 질병도 나을 것이고 젊음도 회복할 것이다.
의로움을 입증받은 그는 내가 범죄하여 옳은 것을 그르치게 하였다. 내가 무익하였다. 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29절 3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심은 두 번 세 번 행하심은 그들의 영혼을 구덩이에서 이끌어 생명의 빛을 비추게 하려 함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결국 엘리후는 욥이여 당신이 이렇게 고통을 받고 질병을 받는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는 고통이고, 아픔일진데 왜 그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변호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당신이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그대를 아픔과 고통에서 건져낼 것입니다. 라는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결국 엘리후 또한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마찬가지로 욥 당신이 틀렸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33절에서는 만일 나의 주장에 대해 할말이 없으면 잠잠하시오. 내가 지혜로 당신을 가르쳐주겠소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번주 금요일에도 제가 잠시 말씀드렸지만 욥은 세 친구와 엘리후의 진리를 가르쳐주겠다 라고 말하는 이 찌름이 없었다면, 더 빠르게 회복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이들을 통해 욥의 심령 깊은 곳에 있었던 스스로 의롭게 여기게 만드는 그런 연약함들이 드러나긴 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 세 친구와 엘리후는 욥에게 어떤 위로나 용기가 되어주진 못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너무 쉽게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야 라는 이 말이 고통의 자리에 놓여진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때로는 아픔으로 찌름으로 전달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기뻐함으로 하나님의 싸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인도하심 앞에서 겸손히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 1.
나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 꿈, 환상, 질병 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만남이 나의 신앙성장에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질문 2.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다가 회복된 경험이 있으신가요? 나를 회복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였나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나요? 그 회복의 여정 중에 내가 가장 크게 의지한 것이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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