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자의 영, 전능자의 숨결 그리고 의로움
다시 욥기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욥이 세 친구와 돌아가면서 열변을 쏟아내며 서로의 주장을 주고 받다가 잠시 화제가 전환되는 시점을 맞이합니다.
오늘은 엘리후가 등장하면서 화제가 전환이 되는데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두가지만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의에 대함입니다.
1절에 보면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김으로 그 세사람이 말을 그치니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욥기에서 욥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겼다. 우리는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를 느끼는데요. 바로 욥기 1장과 2장에서 등장하는 말씀인데요
하나님이 욥을 바라보시는 시각입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인정하시는 구절이죠. 욥의 행위는, 욥이 살아온 모든 방식은 사실 흠잡을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좀 예를 들만한 분을 찾아보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인물 두 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한분은 사랑의 원자탄 이라고 하는 손양원 목사님, 그리고 또 다른 한분은 일사각오의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사실 저 두분이 욥이랑 큰 상관관계는 없지만 제가 갑자기 저 두 분을 예로 든 것은 두 목사님의 생애와 삶이야 말로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흠을 잡거나 꼬투리를 잡아 그의 생애를 깎아내릴 만한 사람이 과연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여기 있는 누구라도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을 향해서 당신의 삶과 신앙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의 삶과 하나님을 향한 욥의 고백과 열심은 하나님도 인정하는 그러한 삶과 믿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찾아온 고난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그의 평탄했던 인생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 더 이상 초라해 질수도 없는 최악 중의 최악을 경험 한 이후의 욥의 고백은 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1장에서처럼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욥의 의가 아니라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늘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렸으며 혹여나 자식들의 죄가 드러날까봐 잔치 후의 자식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리던 특심이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녀들이 갑작스레 죽임을 당하고, 수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강탈당하고 종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에도 욥은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종기가 나고 재 가운데 앉아서 깨진 기왓장으로 가려운 몸을 긁고 있을 때에도, 욥의 아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을 퍼부을 때도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찾아오고 절망과 괴로움이 자신을 짓눌렀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욥 자신에게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 것인가 라는 자신의 신념이 도전받게 되자 욥의 고백은 처음의 고백과는 다르게 아니다. 나는 범죄하지 않았으며, 나의 의는 그렇게 범죄함으로 드러낼만한 악으로 더럽혀지지 않았다. 나는 의롭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습니다. 욥이던,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이던 그분들이 삶으로 보여주었던 신앙의 고백이 정말 높은 칭송과 모범이 될지라도 그러한 삶의 자세가, 신앙의 열심히 다른 사람은 범접할 수 없을만한 높은 수준의 도덕과 윤리적 행동을 수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의로울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씻음을 얻은 의롭다 칭함받은 칭의뿐입니다. 그 조차조 의롭다 칭해주시는,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일 뿐이며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없이는 그 칭함도 받을 수 없는 존재가 인간 이라는 존재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에 대해서 기록되어져 있지만 이 믿음 또한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로 여겨짐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모든 인류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의롭다 칭하여 주실 때에야 만이 의로움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입는다 라는 뜻의 칭의라는 말은 ‘의’ 자체가 된 것이 아니라. 본래는 의롭지 못한존재 이것이 본질이지만 그 본질 위에 의로움을 입히셔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드리자면 입양과도 같습니다. 나의 핏줄은 아니지만, 어떤 아이를 입양함으로써 이 아이를 자녀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의는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의 이십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또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음으로 그 의를 받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러기에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절대로 의가 없다. 나는 선한 것이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나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담당하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내게 의를 덧입혀주셨고, 하나님은 그 보혈로 옷입은 나를 보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다. 라는 사실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본래 그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는 믿음이었지만, 고난을 거쳐가며 괴로움중에 있는 자신을 향하여 친구들이 정죄하자 자신은 의롭다. 라고 변호해왔던 그 결론이 오늘 본문 1절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겼다. 라는 것이죠.
이제 갑자기 잠시 화면이 전환됩니다.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을 지나서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엘리후 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 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분을 확인시키고 자신이 나이가 여러 해 어리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참고 있다가 5절에 보면 엘리바스와 빌닷 소발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자 화가나서 등장했다고 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실제 지명과, 자신의 출생의 혈통을 드러내는 엘리후를 등장시키면서 욥기를 실제적인 사건으로 보여지게 하고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 엘리후를 등장시켰다 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론 매일 성경이 12월 31일로 욥기가 끝나는데요. 계속해서 엘리후에 대해서 묵상을 하겠지만 사실 엘리후도 세 친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러한 존재입니다. 물론 엘리후의 대답을 들어보면 정말 그럴싸한 주장을 많이 펼치게 됩니다. 한구절 한구절씩 그 구절만 뜯어내어서 살펴보면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되자만 전체적인 문맥상으로서의 주장은 욥에게, 또한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인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나누고픈 말씀은 영입니다.
엘리후의 말을 문맥이 아니라 한구절씩 뜯어서 보면 깊은 묵상의 재료가 되는데요 그중 8절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8절 앞에 등장하는 ‘그러나’ 와 뒤에 등장하는 9절의 말씀을 뺀다면 깊은 묵상의 재료가 됩니다. 엘리후가 8절을 말을 한 이유는 그러나 앞에 있는 7절과 9절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연소함을 변호하기 위한 말이라는 것이죠. 나이많은 자 지혜로운 자가 말하는 것이 마땅하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깨달음을 주기 때문에 내가 나이가 연소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라는 뜻이죠.
이 진리라고 하는 깨달음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문제삼지 않습니다. 다만 예를 차리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진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의 숨결, 곧 하나님의 생기가 생령이 되어 흙으로 티끌로 창조된 우리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하여 타락해버린 인간들은 로마서 1장에 기록된대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상실한 마음으로 버려둠을 당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허탄한 것을 쫒을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호흡으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이며,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래야 할 것입니다.
두가지 질문을 드리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질문1.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의 행위나 도덕적인 우월성을 가지고 나는 이정도면 의로운 존재야 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로 하여금 의롭다고 여기게 만드는 ‘종교적행위’가 있으신가요?
질문2.
영적인 세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으신가요?
나의 믿음은 영적인 세계를 갈망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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