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욥기를 묵상하고 있는데요 오늘의 본문은 34장 21절에서 마지막 3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에리후의 두 번째 연설의 마지막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어제 여러분이 읽고 나누신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이 31절에서 37절까지 병렬 구조로 구성되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는 엘리후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려고 했던 문학적인 의도가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히브리 문학의 많은 부분이 이런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a 파트에서 주장한 내용을 마지막에 한번 더 강조한다던지, 아니면 a파트의 주장을 마지막에서 다시 해석한다던지 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죠.
구조를 살펴보면 지혜자에게 판결을 구하는 부분인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에 대하여 자신이 판결자가 되어 34절부터 37절까지 엘리후가 욥을 정죄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욥의 죄목에 대해서 심문하는 부분이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인데요. 이후에 31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엘리후는 욥을향하여 스스로 죄를 시인하고 자백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엘리후가 아주 문학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치밀하게 욥을 압박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함께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를 욥에게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적용시키는 부분이 21절부터 30절까지 기록되어 있고요. 그로 인해서 욥은 정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주장하는 31절부터 37절까지의 두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두 단락을 중심으로 짧게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엘리후는 21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행악자는 숨을곳이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인 심판이기에 오랜 시간 조사할 것이 없으신 하나님 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엘리후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하여 인간이 감히 도전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또한 엘리후가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세력이 있다고 힘이 있다고 하는 자들을 단번에 꺾으시고 (24절) 다른 사람을 세워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밤 사이에,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의미하죠. 아주 단 순간에 행악자의 행위를 아시고 그를 꺾고 뒤집어 엎으시고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시는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이 그려지십니까? 아주 정의롭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그려지시나요?
저는 엘리후가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화상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면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과 같은 그림이 그려집니다. 범죄한 이들은 어느 곳에도 숨을 수가 없고 그 죄를 낱낱이 밝혀서 드러내시고 죄인을 단번에 꺾으시고 다른 이들에게 영광의 자리를 빼앗아서 주시는 그런 하나님.
범죄한 이들을 단죄하시되 오래 생각하지 않으시고 단번에 사람의 심령을 꿰뚫으시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가차 없이 내치시는 하나님.
악인을 들어 본보기로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통을 주어 많은 사람들이 그 고난받는 이를 바라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 자신의 길을 깨달아 알도록 하게 하시는 하나님.
엘리후의 주장을 들어보면 하나님은 이런 분으로 그려집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의 의가 욥보다 대단합니까? 하물며 욥도 이러한 정죄를 받고 있는데 우리 중에서 우리의 도덕적인 행위와 열심히 욥을 앞설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변론에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아주 무섭고, 단 한톨의 불의도 절대로 용납하지 아니하시는, 즉각적으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려지진 않으신가요?
물론 하나님의 속성에는 의와 정의, 공의가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까이 하지 않는 분이시며 죄를 미워하시고 완전한 의로움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본인의 의의 기준으로 우리를 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그 능력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고 겸손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자발적인 겸손과 의로운 삶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마땅히 인정하고 왕 되신 주님께 우리의 무릎을 꿇어 겸손하게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을 기다리고 사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불의함 때문에 범죄함 때문에 나의 육체와 재산과 가족을 치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감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회개시키시고 영원한 영생과 구원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공의로 우리에게 심판과 불로 다가오시는 것 조차 참으시고 자신의 의로움보다 오래 참으시고 자비하심을 택하신 것은 실로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야. 내가 무엇을 해도 다 이해하실 거야, 라고 말하면서 방종하는 삶을 살면서 양심의 가책을 버린채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감사하며 나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그 은혜를 묵상하며 겸손을 나의 심령과 육체에 새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욥을 극렬하게 단죄하는 엘리후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31절부터 끝절 37절까지입니다. 그중에서도 엘리후는 36절을 통해 이미 고난의 끝에서 허덕이고 있는 욥을 향하여 이 욥이 끝까지 시험받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욥이 말하는 것이 악인과 같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아 끝까지 시험을 받으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욥의 세 친구보다 더 극렬하게 욥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는 엘리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엘리후는 왜 이렇게 욥을 코너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위에서 잠시 나누었지만 엘리후가 그리는 하나님은 아주 공의롭고 악을 참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그리고 있었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욥의 태도가 불편했던 것이죠. 오히려 욥은 아니다, 자신은 옳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고수해왔던 신앙과 내가 그려놓은 프레임과 틀 안에 하나님은 이러한 분 이라는 이미지를 설정해 놓고 그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정죄와 비난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신앙, 하나님의 이미지와 벗어난 주장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었지만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아내와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다보면 서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제 신앙과 기준으로 믿고 알고 있는 하나님과 아내의 신앙으로 만난 하나님이 서로 조금 달랐기 때문입니다. 왜 엘리후는 욥을 향하여 저런 독설과도 같은 말을 쏟아냈을까요?
왜냐하면 선함과 정의의 기준이 바로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도덕적 기준이 아주 높은 사람은 민감하고 극렬하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도 하고 그 기준에 부합한 이들은 부정하다고 여깁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죄와 의에 대하여 매우 관대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다 이해하실거야. 라는 식으로 아주 낮은 잣대를 부여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실 이 두 주장은 모두 다 틀린 주장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정죄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척도는 어떤 도덕적 우위나 행위적인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율법의 일점 일획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정받았던 종 욥 또한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인데 하물며 저와 여러분이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모든 인생의 여정과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시고 뒤집어엎고 흩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 참으시고 우리를 잠잠히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경험한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욥처럼 의로운 삶을 살아오지 못했을지라도,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을 살아가며 탈탈 털어도 하나님께 드릴 온전한 열매 하나조차 없는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매일 매일 조금씩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걸어가기를 힘쓰며 열매맺는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정죄하시기보다 오래 참으시기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날마다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방종하거나 죄악가운데에 내던지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우리의 삶이 예수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기를 힘쓰는, 경건과 겸손의 삶을 다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