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시간을 지나서 엘리후의 마지막 담론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37장 14~24절까지의 말씀이 욥기에 나타난 인간의 마지막 발언입니다. 이후 38장에서 드디어 고대하고 기다리던 하나님이 등장하시게 되죠.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엘리후는 계속해서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법칙들을 개진하면서 욥에게 너가 이 지혜를 설명할 수 있는가? 라고 물어봅니다. 엘리후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욥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사람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는 자연계의 신비로움에 대하여 대답하라고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다 깨달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의 진보가 엄청난 수준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매년마다 수많은 내용들이 새롭게 발명되는 초과학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며칠 앞으로 다가올 기후의 변화에도 쉽게 대응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기상청에서 내일 비온데 하고 우산을 가지고 나가면 꼭 비가 내리지 않고, 비 안온대 라고 해서 우산 없이 나가면 그날은 여지 없이 비가오는 그런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죠.
최근에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4.9의 강진이 발생했지만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고, 인도와 일본을 덮쳤던 쓰나미 지진 해일도 우리는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과학이 발달하고 저 우주 위로 위성들을 띄워서 구름의 흐름과 대기의 변화들, 태풍의 경로등을 관측하고 예측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단지 예측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죠.
자연의 법칙은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 밀접하게 가까이 다가와 계절의 변화를 알아 씨를 파종하고 열매를 수확하고, 때가 되면 물때를 알아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법칙으로 인해서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주에 관한 과학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우주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광활한지를 생각하면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우주의 공간에 둥둥 떠있는 행성을 두 발로 서서 걸어다닌 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지구가 엄청난 속도로 자전하면서, 태양을 엄청난 속도로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어지럼증도 느끼지 못할뿐더러 엄청난 중력으로 서로를 잡아당기는 이 힘의 균형이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달의 인력과 태양과 지구의 이 거리와 에너지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죠.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멈추면 타고 있던 사람들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것처럼, 백미터를 달리던 운동선수가 결승점을 통과해도 곧바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달리다가 서서히 멈추는 것처럼 물리적인 어떤 법칙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이 우주의 세계 안에서는 때로는 어떤 힘이 상쇄되기도 하고 충돌되기도 할텐데 이 신비로운 법칙이 다 이해되지 않은 채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며 이 땅을 딛고 뛰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물리학자가 아니어서 다 정확하게 무언가 이론적으로 더 자세하게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물리학자들도 이러한 신비를 다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엘리후가 욥에게 물어보면서고 너가 대답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욥을 골탕먹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 창조의 신비 가운데 욥에게 대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지 그 질문의 의도를 확실히 모르겠지만 엘리후는 욥에게 이 창조와 천지를 운행해 가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에 대답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19절 2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
이 말은 엘리후가 욥에게 대하여 너가 지혜를 알고 있다면 우리를 가르쳐보아라 우리는 지혜가 없어 하나님께 말할 수 없으니 너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으면 가르치라고 말합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수 없는 욥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엘리후의 말이 맞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와 그 신비로움에 대해서 말 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의 한계를 만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신비에 대해서 우리가 다 해석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계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크신 능력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는 만물이 주의 영광을 나타냄과 동시에 우리 인간을 이 땅가운데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섭리가 창조안에 담겨진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이 자연을 잘 가꾸고 소중히 대해야 하는 청지기적인 사명을 받은 자임을 기억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영역 또한 해석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의 같은 선상에 있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엘리후는 마지막으로 22절부터 24절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담론을 마무리 합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은 두려운 위엄이 있는 분이시다.
23절에서는 우리는 전능자를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공의로운 분이시다.
24절에서는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경외하여야 한다.
라는 고백을 하며 자신의 담론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러한 정답과도 같은 엘리후의 담론은 욥에게 아무런 해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후 조차 자신의 담론이 듣는 이로 하여금 어떤 의미로 전달되는지도 모른채 쉴새없이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있었죠.
우리 인간은 우리가 가진 지혜로 모든 것을 이해하며 해석하며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첫걸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첫걸음을 내딛어 걸어갈 때에 우리는 이 관계를 잘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죠. 하나님은 물론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면서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면서 우리의 주가 되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기도 하시며 우리를 백성으로 종으로 부르시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는 우리는 겸손히 나아가야 하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 안에서는 참 기쁨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는 부르짖어 은혜의 손길을 구해야 하고 평안중에 있을때는 친밀한 교제가운대로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맹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만나게 되는 모든 현상들, 모든 여정들을 이끌어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신앙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만약 내가 만나는 모든 일을 내 기준과 내 지식으로 다 해석하려 한다면 얼마나 어렵고 힘들까요?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은 일들을 분명히 만나게 될 것인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를 알지 못하는 많은 인생들은 그렇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생각에 옳은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게 됐을 때에도 자신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원망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가기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생가운데 그 방향의 키를 쥐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는 그 방향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때로는 폭풍우를 만나고, 비바람을 만나더라도 방향이 바르게 설정되어 있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견뎌내면 됩니다.
그 옳은 방향대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길을 여전히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으로 내 인생이 해석되어지고 계십니까?
우리의 믿음이 주님께 있음을 진실하게 또 온전하게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질문 1.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앞에서 영적인 두려움과 엄위하심을 느껴본적이 있으신가요? 그때 내가 드렸던 고백은 무엇인가요?
질문 2.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앞에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느껴본적이 있으신가요? 그때 내가 드렸던 고백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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