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와 성령
(고전 12:1~11)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은사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장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적지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 이 은사와 관련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는데요. 8~90년대에 많은 부흥강사들이 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어떤 신비한 능력과 체험에 기반한 접근을 주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간과한 것이 성령보다는 어떤 은사라는 특징에 관해서는 깊게 심취한 반면에 이 은사를 주시는 분과, 이 은사의 쓰임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가르침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게 이 은사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이유는 교회 안에서 이 은사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이 장을 기록한 것이죠.
오늘 바울은 12장 1절에 이러한 말로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것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 라는 단어인데요. 우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단어죠. 바로 프뉴마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프뉴마는 숨, 공기, 호흡, 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성령을 표현할 때도 이 프뉴마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3절에서 쓰는 하나님의 영은 프뉴마티, 4절에 기록된 성령은 프뉴마 라는 단어를 사용했죠.
프뉴마, 프뉴마티, 프뉴마티코스 이 모든 단어는 성령으로부터 파생된 영적인 흐름에 대한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령한 것’의 의미는 성령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령한 것, 영적인 것, 어떤 능력에 있어서 성령님이 제외되거나, 간과시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거죠.
우리가 신령한 것, 영적인 것을 해석하고 풀이할 때는 이것이 성령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교회의 질서 안에 있는 것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능력이나, 어떤 영적인 해석은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선물에 관하여 알기를 원한다. 라는 의미로 1절을 쓴 것이죠.
왜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알아야만 했는지 그 이유가 2절과 3절에 등장하죠. 이 말씀을 풀어서 쓰자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잘 알다시피 너희가 이방인으로 이교도로 있었을 때에는 헛된 우상에게 매여서 우상에게 끌려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또 성령의 이끌림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
이렇게 2절과 3절에서 먼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우상의 습관들을 그대로 교회에 가져와서 적용하는 것과, 그리고 너희가 어떤 신령하고, 영적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너희가 성령의 은혜로 살고 있다면 예수를 저주할 수 없고,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조차 없을 것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사와 직분과 사역에 대해 하면서 이 모든 것의 주체가 성령님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4절에 은사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는데요. 이 은사라고 하는 것은 카리스마타 라고 불립니다. 이 카리스마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 것이 어떤 한 인물의 특별함이나 노력이나 열심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죠.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받는 이로 하여금 어떤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도 있고, 또 받는 이의 유익을 위하여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이 사람이 이 선물을 통해서 더 나은 삶을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선물을 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도 이러한 선물을 교회 공동체에 속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은 각 사람의 행복과 또 유익을 위해서 또 공동체의 행복과 유익을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4절에는 은사와 성령으로, 5절에는 직분과 주님으로, 또 6절에는 사역과 하나님으로 으로 각각 다르게 등장하는데요.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등장시키면서 이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고 가능케 하시는 이가 한 분 하나님임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은사도, 직분도 사역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며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가진 어떤 특별함이나 특수함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어떤 부흥사나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기도원이나 교회를 순회하면서 어떤 능력을 행하는 일들을 하는 분들이 더러 있죠.
이들이 하는 일들이 보통 병 고침이나, 점쟁이처럼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 기도같은 집회를 많이 하는데요. 사실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제주에 막 내려왔을 때도 대한민국에 전쟁이 난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요. 홍혜선이라는 사람이 엄청 이슈였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벌써 7년전이네요. 그때 그 홍혜선이라는 여인의 말을 맹신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민과 피난을 떠났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집회를 다니면서 거짓 선동을 많이 했죠.
하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거짓 선지자가 사용한 것이 바로 ‘예언’이라는 것인데요. 사실 예언이 아니라 거짓선동이었죠.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거짓선동에 넘어갔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예언을 한다고 아주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을 하죠.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하니까 진짜 그런가? 하고 속았던 것이죠. 하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은 이렇게 사람들을 선동하고 미혹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사용하는 레파토리 중 하나가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은사를 주시는, 직분을 주시는, 또 사역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유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7절에 기록되어 있죠.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또 공동체를 유익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홍혜선이라는 거짓선지자가 한 일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가정을 분열시키는 일을 했으며 결국에는 그가 한 말들이 다 거짓이라는 것이 들통이 났죠.
참 뻔뻔하게도 그가 예언했던 14년 12월 14일 새벽 4시반에는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잠만 잘 잤습니다.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해외로도 도피하고, 저기 지방으로도 도망가고 엄청난 일들이 있었죠.
아무런 유익도 없고 분열과 혼란만 있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주신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미혹한 것이죠.
그런데 홍혜선씨 뿐만 아니라, 지금도 기독교 안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언이나, 치유나 영분별, 능력과 같은 약간 모호하고 신비한 단어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자신의 생각대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미혹되지 아니하고 실제로 성령의 이끄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의 주체가 성령님이심을 기억해야 하고 성령께서는 이 은사를 통해서 개인과 공동체를 믿음안에서 세워가시기 위함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바울은 12장 7절부터 11절까지 몇가지의 은사를 나열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총 아홉가지의 은사를 나열합니다.
실제로 제가 서울에서 신앙생활 할 때 제가 섬겼던 교회는 여름과 겨울에 수양회를 가는 것이 엄청 큰 행사였는데요. 마지막 날 밤에는 늘 은사집회라는 이름으로 은사에 관해서 설교하고 은사를 받기 위해서 엄청나게 기도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사 받은 사람들은 일어나라고 하고, 막 박수쳐주고, 저는 그렇게 은사 받은 사람들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혹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누가 내 방언 기도를 통변해서 듣는 건 아닌가 하고 오히려 기도도 못하고 나도 통변을 하거나 능력을 행하거나 병을 고치거나 하는 은사를 달라고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라고 목이 터져라 기도했지만 기도 후에 오는 탈진과 은사 받은 이들을 바라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은사를 받았다고 일어난 사람들이 진짜 어떤 은사를 받은 것인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오히려 교회를 떠나거나 어떤 분란을 일으킨 사건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은사에 대해서 나열한 것은 비단 이 은사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 이 은사는 교회를 섬기기 위함인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1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단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은사 뿐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은사 곧 선물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통해서, 또 내가 맡은 직분을 통해서, 내가 감당하고 있는 사역들을 통해서 나의 영혼의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고, 또 나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세워나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각 사람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공동체가 질서 안에서, 또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세워져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은사(선물)은 무엇일까요? 본문에 기록된 은사가 아니더라도 나에게 주신 선물이 있음을 발견하셨나요?
질문2.
나의 은사로 인해서, 직분과 맡은 사역을 통해서 우리 교회공동체는 유익을 누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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