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에 대하여
(고전 10:23~11:1)
오늘의 본문의 시작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모든 것이 가하다 라는 슬로건을 한번 더 등장시키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바울은 10장의 본문에서는 양심에 관하여 고린도 교인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그들의 양심의 자유에 대해서 설명하는데요. 오늘의 본문 2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오늘의 본문은 6장 12절과 동일하게 쓰여졌는데요. 12절과 다른 부분은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라는 내용이 다르게 등장합니다.
이 덕을 세우다는 단어를 영어로는 edify 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교화시키다. 의식을 고양시키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edify 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오이코도메오 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요 이 단어가 건축자가 되다. 건축하다. 세우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용납되고 가능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람을 온전히 세우는 것은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 이유가 25절 아래부터 등장합니다.
25절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제가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만 당시 고린도 지역은 우상숭배가 아주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여러 신전들도 있었고 그 신전에서 일하는 사제들도 많았었죠. 그리고 그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제들 안에서 다 소비가 되지 않아서 일반 시장에서 유통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면 판매되는 고기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이 고기가 그냥 도축을 한 일반 고기인지 아니면 우상의 제물로 드려졌다가 다시 시장으로 내려와서 유통된 고기인지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죠.
이에 대하여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기를 먹는 문제와 양심을 결부시켜서 고린도 교회를 권면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말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이 시장에서 고기를 사먹는 문제로 인해서 다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할랄푸드 라는 얘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건데요. 이 할랄푸드는 무슬림들이 먹지 못하는 음식을 구분하기 위해서 마트에서 유통되는 식료품에 할랄 마크를 붙여서 판매합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도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이 구분되어져 있는데요. 유대인들은 이것을 코셔 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등을 여행하다보면 식표품을 판매하는 마트에서 이런 코셔 마크와 할랄 인증마크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죠.
한국에도 이태원과 같은 지역을 다니다보면 코셔마크와 할랄 마크가 붙어있는 식료품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런 코셔 마크를 붙여서 파는 것도 아니고, 이 고기의 출처가 어딘지 도통 알 길이 없었던 시절이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시장에 가서 음식을 살 때마다 이 음식이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겠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이들은 시장에서 유통되는 고기를 사 먹는 이들을 향해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아예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스스로 의로운 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이로 인한 다툼 때문에 바울은 너희가 너희의 양심을 위하여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해서 묻지 말고 그저 먹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먹을 것을 만드신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6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을 바울이 가르치면서 이것이 우상에게 바쳐지기 위해 예비되고 준비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기 때문에 고기의 출처를 따질 필요 없이 이 음식의 문제로 인하여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장로의 전통을 따라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정결예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너희가 먹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이며, 입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산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이와 같이 먹는 것에 대한 것은 양심에 얽매이지 말고 그저 먹으라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28절 아래로는 또 그와는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접속사가 빠져있는데요. 28절 앞에는 만약에, 만일,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너희가 시장에서 파는 것은 그냥 먹어도 되는데, 그런데 만약에~ 라고 하면서 28절이 시작되는 것이죠.
만약에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고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분명히 조금 아까까지는 그냥 물어보지 말고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28절에는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너희에게 이거 우상에게 올려졌던 제물이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을 알게 한자와 그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29절에서는 28절에서 말한 그 양심은 너희의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개역개정 말씀이 문법상 이해하기가 약간 애매하게 쓰여졌습니다. 28절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을 풀어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데요.
너희가 고기를 샀는데 누군가가 이 고기가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이라고 말한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너희의 양심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양심 때문에 그렇다.
어떤이는 왜 나의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인해서 제약을 받아야 합니까? 라고 말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이 음식을 받아서 먹는다면 내가 판단을 받을만한 이유가 있겠습니까? 내가 비방을 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함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가치와 딱 맞는 말씀입니다. 저번주 금요일날 잠시 말씀을 드렸듯이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아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있는자에게는 율법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이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사람들처럼 대했던 인물입니다. 그 이유는 몇사람이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죠.
그런데 이 우상의 음식을 먹는 문제 때문에 어떤이는 왜 저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그냥 먹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서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이죠. 저 사람 저렿게 안봤는데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네, 실망을 금치 못하겠군 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이 전에 8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었죠.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라는 그 마음이 오늘의 구절에도 나타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면서 많이 인용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떤일 을 하던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자. 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지만 본래 이 말씀의 뜻은 위와 같은 배경을 가진 말씀인것이죠. 먹는 것, 그리고 마시는 것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낌을 받지 말고, 어떤 음식을 먹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어떤 음료를 마시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무엇을 하던지 복음이 전파되는 삶이 되도록 힘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또 반대로 말하자면 너희가 먹지 않든지 마시지 않던지 무엇을 하지 않던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한 바울의 공격적인 복음 전파는 모든 관습과, 행위와, 사상과, 심지어는 율법까지도 뛰어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 고백이 오늘의 본문 마지막 33절과 11장 1절에 기록되어 있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전파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시대에도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우상과 이방이 사방으로 있던 시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무슨 일을 하던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기에 힘을 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이익과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을 구원하기에 힘쓰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지만, 우리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한 그 복음전파의 일에 포커스를 맞추며 살아간다면, 연약한 나의 작은 몸짓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처한 곳에서 나의 권리를 포기하며, 나의 유익이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면서 그곳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기를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교회에 다니고 있지 않은 불신자를 만나 교제한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유익을 흘려보내줄 수 있을까요? 나는 복음을 위해 나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나요?
질문2.
내 삶의 포커스는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나의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내 안에 그리스도는 존귀히 여김을 받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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