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있습니다.
우리나라 공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뭐 여러 가지를 꼽아볼 수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질문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입식 교육이 큰 문제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자 질문은 나중에 해라. 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고요. 심지어 대학을 다닐 때도 수업이 끝날 때 즈음 질문을 하면 동기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빨리 끝내고 쉬어야 하는데 왜 자꾸 질문을 해서 쉬는 시간을 갉아먹냐는 뜻이었죠. 뭐 물론 제가 엄청나게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만 질문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는 확실히 느꼈습니다.
요즘 저희 청소년부 아이들하고 줌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거든요. 현장에서 모이는 모임이 아직 안되어서 온라인으로 만나서 작은 소책자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현장감은 떨어지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나름 아이들도 열심히 따라와 주어서 감사한데요. 그렇게 성경공부를 마치고 나면 제가 꼭 물어봅니다. 오늘 배운 공부에서 질문 있는 사람? 하고 물어보면 아무도, 단 한 명도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2주 전에는 숙제로 오늘 공부한 내용에 대해서 질문 하나씩을 생각해서 개인 카톡으로 보내세요. 라고 했는데 여러분이 예상하시는 대로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번 주도 역시 공부가 끝나고 질문하라고 했지만 아무도 질문을 안 했기에 이번엔 수학 및 영어 문제 빼고 아무거나 인생 살면서 궁금했던 것들 아무거나 질문 하나씩 숙제로 하라고 했는데 또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어제도 성경공부 이후 질문을 숙제로 내주었지만 네 그렇습니다.
이쯤 되면 질문하기가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제가 싫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참 질문을 안 합니다. 이게 한국 공교육의 문제점입니다. 그런데 공교육을 아직 경험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보면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미취학 아동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열심히 질문을 합니다.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하면서 말이죠.
우리 소원이 진언이도 그렇습니다. 일상적인 것도 물어보는 것이 많지만 요즘은 주일학교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오면 질문을 하곤 합니다. 엄마는 아빠가 전도사님이니까 아빠한테 물어보라고 합니다. 요즘 소원이가 물어보는 질문은 아빠 하나님은 여자예요? 남자예요? 라고 물어보고요, 진언이는 아빠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을까요? 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목사님께 물어보라고 해서 아이들이 목사님께도 질문하고요. 목사님께서는 친절하게 아이들에게 답을 해주시는데요.
특히 선악과에 대한 의문은 한 번씩은 다 가져보시지 않으셨었나요? 최근에는 진언이가 아빠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행히도 목사님께서 진언이에게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는데요. 궁금하신 분들은 목사님께 맛있는 것을 사 오신 이후에 질문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을 보면 왜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서론에 말씀을 드렸는지 이해가 되실 거라 생각이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바로 질문 있습니다. 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 질문을 가지고 온 한 인물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마가복음의 본문이지만 이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거의 일치한 내용으로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에 똑같이 이 내용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 혹은 그 공동체가 이 사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이 인물에 대한 특징을 금세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요. 하나는 율법을 잘 지켜왔던 사람이라는 것, 두 번째는 돈이 아주 많은 부자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배경으로 보았을 때는 이 사람이야말로 그 시대의 엄친아였습니다. 엄친아가 무엇인지 아시죠? 엄마 친구 아들. 엄마 친구 아들은 하나같이 잘났습니다. 대학도 좋은 데 가고, 대기업 다니고 게다가 효도도 잘하고 장가도 잘 갑니다. 이상하게 엄마 친구 아들, 엄마 친구 딸은 그렇습니다.
여기 나온 인물이 바로 그와 같은 인물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율법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리새파거나, 열심 당원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고로 많은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에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존재가 바로 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이 부자 청년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는 칭송을 받는 존재였지만 그 청년은 단 하나의 답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전통을 통해 내려오는 가르침을 이행하기 위해 애를 쓰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 선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도 그의 삶을 온전히 만족하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찾아와 어찌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청년의 속마음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알고 있지 않으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다. 라고 말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이 내용은 십계명 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십계명은 1계명에서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고, 5계명부터 10계명 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다시 그 청년에게 질문하십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그 부자 청년은 자기의 의를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예수님께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를 때에도 선한 선생님이여! 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높이듯 말했지만 사실 그 말의 뜻은 나는 이미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상태입니다. 나는 율법에서 말하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선을 입증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니 나의 의로움을 옳다고 말해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은 자신을 더 의롭게 만들어주는 답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한두 개는 못 지켰지만, 이 아니라 다 모두 다 지켰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시고선 예수께서 청년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부자 청년이 듣고 싶어하던 대답이 아니었음을 2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이 듣고 싶었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래? 너 정말 대단하구나 이 율법을 지키는 게 쉽지가 않았을 텐데. 정말 너는 천국에 가까운 사람이구나. 이제 네가 해야 할 것은 더 율법을 열심히 지키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을 듣기를 간절히 바랐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너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슬픈 기색으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하러 올 때만 해도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근심과 슬픔 속에서 예수님을 떠나가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율법을 지켜온 부자 청년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재산이 얼마 정도 되는가 가늠하는 분이 분명히 있으실 겁니다. 내가 가진 거 다 팔면 나는 어디서 살지? 나는 뭐 먹고 살지? 이거 판다고 하면 나 집에서 쫓겨나겠지?
라고 생각하시면서 슬픈 기색을 하는 분이 계신 것 같습니다만 근심하며 떠나지 마시고 설교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자 청년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인물의 스토리가 연관 돼서 생각이 나게 됩니다. 누굴까요? 이 부자 청년과 비슷하지 않으면서 비슷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삭개오 입니다.
오늘은 제가 마가복음을 본문으로 했는데요 조금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든 복음서에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부자 청년의 내용이 누가복음에서는 18장에 등장하는데요. 19장에서 바로 삭개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으시나요?
뭔가 비슷한 부분은 두 사람의 신분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면서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열심히 있었습니다.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부자 청년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삭개오는 모든 사람이 죄인 취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숙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정말 바보거나 철면피가 아닌 이상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 있고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대충 알게 됩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 자신을 달갑게 바라보지 않는 시선을 다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가셔서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다. 어떤 대화를 나누셨다. 라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삭개오를 보시고 그 집에 머물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에 영접하기도 전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는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해주십니다.
삭개오가 찾아와 영생을 얻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났고 자신에게 오시겠다는 말씀을 들은 삭개오는 자신의 재물을 나누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부자 청년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8장, 19장에 연이어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아 영생을 얻으려면 한 푼 가진 것 없는 거지가 되어야 하는가? 모든 것을 다 팔아야 하는가? 집도 없이 아무런 소유 없이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삭개오처럼 절반이라도 팔아야 하는가? 절반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 라는 고뇌일까요?
성경에서 이 말씀이 기록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정말 무소유의 삶을 살라는 것일까요? 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고자 하는데요.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부자 청년이 영생에 관해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에 대해서 얘기해주십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할 5계명에서 10계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1계명에서 4계명까지의 말씀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안 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의 마음을 미리 알아보시고 그 이외의 계명을 먼저 물으신 것입니다. 그 이후에 부자 청년이 나는 율법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라고 고백하자 그제야 예수님께서는 21절을 통해 부자 청년을 깨우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자신이 재물이 많기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21절 안에는 1계명부터 4계명까지의 계명이 함축해서 들어있습니다. 가진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너의 마음에 참 주인이 누구인가? 라고 물어보시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 청년에게 중요했던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의 재물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 예수님의 물음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남들이 보기보다 율법을 잘 지켜왔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어려서부터 열심히 있었던 그 부자 청년은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심령 깊이 감추어진 본질을 건드리시면서 그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로 고백하고 있는지를 현실적인 질문으로 터뜨리신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누가 봐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실한 청년으로 비추어졌겠지만, 예수님 앞에서 그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에 반하여 삭개오에게는 율법을 지켰는지 율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묻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그에게 찾아가셨고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자신의 영혼이 격변하는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을 온전히 주님으로 모셔드리기로 결심한 것이 그의 고백을 통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의 결론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질문이, 우리의 기도가, 너무 손쉬운 해답. 빨리 우리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결론을 원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 속에서 우리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정하여 놓고 그것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거나 아니면 깊이 있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께 다가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고 물은 그 질문에는 실제로 영혼의 구원,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정말 몸부림치며 그 해답을 찾아내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켜오며 살았던 그 삶에 대한 보상적인 해답을 듣기 원해서 예수님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정도로 율법도 어려서부터 지켜왔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저의 삶을 보신다면 저 같은 사람이 구원을 얻을만한 하나님의 자녀이지 않겠습니까? 라는 속뜻이 그 부자 청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자신의 인생을 인정받고 싶은 대답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영생도 쉽게 얻어질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지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정확한 해답을 알려주는 길로 인도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깊어질수록 명쾌해지고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고민하게 되고 더 많이 어려워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했던 대답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그 누구도 트집 잡을 만한 거리가 없는 인생을 살았을지라도 그것으로 손쉽게 나의 신앙생활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 맞추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부자 청년과 같이 우리 또한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존재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을 때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 이후의 사건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후에 다시금 깨닫고 자신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쫓았는지, 아니면 그냥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나타날 변화를 기대하면서 살아갈 기회를 얻은 자들입니다. 오늘의 본문 26절에 제자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지만 이 구원의 길이 영생의 길이 이토록 어려운 것인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 정말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이야기인가! 라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2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공관복음에 다 등장하지만, 마가복음으로 결정한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참된 진리를 가르치시는 장면 앞에 21절 상반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정죄하고 너는 아직 한참 멀었어. 너 같은 애들은 천국에 절대 못 와. 네가 가진 재물을 포기할 것 같아? 너는 나를 섬긴다고 하지만 결국은 재물을 섬기는 녀석이었어. 너는 절대로 구원받지 못할 존재야. 너는 틀렸어. 너는 최악이야. 너는 지옥행이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생을 살아가던 그 인간의 참된 모습 앞에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하나님을 자기 입맛에 맞추며 믿어왔던 그러한 인간의 추악한 본 모습을 바라보시며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사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 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붙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가지고 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끌어안으시고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켜야 할 가정과 자녀가 있고 이 땅에서의 삶을 고군분투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희 가진 것 다 팔아라. 무일푼으로 나를 쫓아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강요하는 집단이 이단입니다. 이 말씀이 이단들이 많이 사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모든 것을 팔아서 무일푼이 되어야지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하면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한 삭개오에게 너 왜 절반은 남겨두었느냐? 물지 않으시겠습니까?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말씀에 담긴 진리는 너의 삶에 참된 주인이 누구이냐? 라고 물어보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서는 영생과 구원에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이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될 수 없으며 내 삶에 주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오라 가족 여러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신앙생활 속에서 어떤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스스로 나는 이만하면 좋은 믿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진리의 말씀을 향한 삼위 하나님을 향한 질문과 고민 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아니면 그저 시간이 지나가는 대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열정도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며 하나님이 없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의 삶만 바라보며 목적지 없이 살아가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에 우리의 신앙에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질문이 기도가 되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한없는 긍휼로 오래 참으시는 자비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솔직한 믿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원하는 대로 믿고, 내 기준대로 하나님을 재단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참된 주가 되어 주셔서 우리가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우리의 삶을 조정해 나가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가 꿈꾸는 교회 건축도 그렇게 하나님 뜻에 합당한 건축이 되게 도와주셔서 우리의 믿음과 주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마음껏 올려드릴 수 있는 처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곽군의 느릿느릿'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 이건 사야해! (0) | 2022.08.19 |
---|---|
불편한 설교 (0) | 2022.08.19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나의 하나님 (0) | 2022.08.19 |
끝과 시작 (0) | 2022.08.19 |
부지런히 가르치며 (0) | 2022.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