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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같은마음 같은 뜻

by 터틀곽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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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마음 같은뜻

(고전 1:10~17)

 

오늘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1장 초반부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고린도는 해상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에 위치한 지역이었습니다. 해상교통이 편리하다는 것은 무역이 활발한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번창한 상업 도시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2차전도여행 동안에 1년 반 동안 체류하면서 세워졌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는 큰 문제 없이 잘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에베소에 장기간 체류하는 바람에 고린도 지역을 떠나야만 했으며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내어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는 크게 세 개의 주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교회의 분열에 대한 내용이 1장부터 4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타락상에 대해서 5장과 6장에 기록하였고요. 그 뒤로 7장부터 16장까지는 교회의 제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1장에 기록된대로 교회의 분열의 문제가 왜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나오는데요.

 

먼저 1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가운데 분쟁이 있었다는 소식을 바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쟁의 원인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분쟁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분파가 각각 나뉘어져서 자신들이 옳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속한자는 바울이 이 교회를 세웠으니 우리는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고 바울이 하라는대로 해야한다. 라는 주장을 폈겠죠.

 

아볼로에게 속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침례요한의 제자였는데요. 웅변과 구약성경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볼로는 아주 달변가였던 것 같습니다. 말도 잘하고 구약성경에도 능통하니 아볼로의 말이 맞다. 아볼로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라고 주장을 했겠죠.

 

또 게바에게 속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죠.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실제로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고 만지고 함께 먹고 자던 인물 아닙니까? 누가 뭐래도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이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를 따르는 이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육체로 계시진 않지만 모든 가르침의 진리의 토대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그들 부류의 이름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자기 분파의 지도자로 삼고자 하는 이들도 등장했던 것이죠.

 

말 그대로 고린도 교회는 수갈래로 쪼개져서 서로 자기가 따르는 분파로 나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을 짓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무리를 이룸으로서 힘을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정치판만 바도 훤히 보이죠. 거대 양당이 발휘하는 힘과 목소리가 가장 큽니다. 결정권도 가져가게 됩니다. 그러니 자신이 속한 당이 크길 바라고 힘을 발휘하기를 바라죠.

 

두 번째로는 자기의 생각과 다른 이들을 쉽게 미워하고 정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의견보다는 다수의 의견이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이념과 다른 이들을 다수의 이름으로 또 익명성을 가지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힘이 약한 쪽은 바른말을 정당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거대 권력을 이기기란 쉽지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이뤄졌다는 말입니다. 특히 이들은 누구에게 침례를 받았느냐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침례를 통해서 당파가 나뉘어진 것이죠. 바울에게 받았느냐? 아볼로에게 받았느냐? 게바에게 받았느냐로 나뉜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안에서도 종종 이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목사님 파와 반 목사님 파가 나뉘어져서 교회가 둘로 갈라지거나 한 건물 안에서 다른 지도자들이 예배 시간을 따로 정해서 따로 예배드리는 일들도 벌어집니다. 그리고 법적으로 분쟁하고 하는 일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바울이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1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어쩌다가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는가에 대한 반대 질문을 그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죠. 분쟁으로 깨어진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하는 작금의 행동이 그리스도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냐? 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느냐? 라는 이 질문은 아볼로와 게바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십자가와 침례는 신앙고백에 가장 기초가 되는 질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로 부름받은 성도는 십자가의 도에 대한 고백을 한 이들로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침례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고백이고 그리스도와 온전한 연합을 이룸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행해지는 성례전이었고 침례를 받은 이들은 교회의 회원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행하고 있던 일은 연합이 아니라 깨어짐이었습니다. 분파를 나누어 분쟁하고 서로를 미워하기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었죠.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만 침례는 베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통해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바울파와 같은 또 다른 당파를 만들까 염려를 했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죠.

 

그리고 그 권면을 맺는말이 오늘 17절에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너희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침례가 아니다. 누구에게 침례를 받고, 누구에게 배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조차 너희가 시끄럽게 분쟁하는 그 말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라. 라는 말씀 입니다.

 

우리 교회는 감사하게도 성도들 가운데 이런 분쟁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죠.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교회 공동체 가운데 경계해야 할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이라고 고린도전서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점에서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는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달되어지고 있는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한국의 고도의 경제 성장과 발맞추어 동시에 급격한 부흥의 시대를 겪었습니다. 신도수는 늘어나고 이 땅에 많은 교회는 세워졌지만, 세워진 많은 교회에 비해 세상 사람들의 인식 안에는 교회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이다 라는 프레임을 벗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우리는 입술로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현재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모습 안에는 사랑도, 희생도 없이 지극히 세속적인 능력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도 자신이 속한 분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난 것이 문제가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 세상의 법칙과 별 다를 바 없는 의미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으로 고백이 되어지나요? 아니면 나의 믿음에 확신이 없고 종교적인 생활 안에서만 만족을 누리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저와 여러분의 신앙과 삶의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같은 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고백이 되고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가는 믿음의 여정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같은 말, 같은 마음을 품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참된 연합으로 나아갈 수 있나요?

 

질문2.

그리스도의 십가가 이외에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신가요? 그것이 내게 자랑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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