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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순전함에 이르는 길

by 터틀곽 2022.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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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함에 이르는 길

(고전 5:1~13)

 

오늘의 본문인 5장의 전체 내용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죄의 문제와 그 일을 치리하는 과정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처음 묵상할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고린도 교회는 해상무역이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해상무역이 활발했기에 아주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해상 무역이 활발한 탓에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각 나라와 민족의 우상들이 총 집결된 현란한 우상 도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에서는 여사제들이 있는 아프로디테의 신전도 있어서 온갖 음행이 자행되기도 했던 도시였습니다.

 

아프로디테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 신화에서 들어본 아데미, 아스다롯, 포세이돈, 아폴로 신전 등 아주 많은 신전이 고린도 지역에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음행과 관련한 죄악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음을 바울이 지적하는데요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너희 중에 죄가 있는데 심지어 음행이라는 죄가 있다. 그런데 그 음행은 차마 이방인들도 하지 않는 음행인데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아버지의 아내를 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라고 바울이 얘기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아내는 본인의 친어머니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고 아버지의 첩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친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고, 유모나, 친모가 아닌 다른 첩이 남편의 자녀를 키우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자신의 친모가 누구인지도 확실치 않은 가족관계도 많이 있었고, 남자들은 때때로 긴 항해로 인해 집을 자주 비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이러한 일들이 종종 일어났던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사회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옳게 보이지 않는 일이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들어서 이러한 음행은 이교도들도, 이방인들도 거리끼는 것인데 이러한 일이 교회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개탄스러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음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 2절을 보면 그 일을 제대로 치리하지 않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저서 어찌하여 통한이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항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고린도 교회가 행한 두 가지 잘못이 2절에 기록되어 있죠. 첫 번째로는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통한이 여기지 아니함 입니다.

 

이러한 음행의 죄악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만한 마음으로 그 일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취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한이 여긴다는 말의 의미는 마음이 아주 괴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교회 내에서 발생했을 때 통한이 여기는 회개의 마음이 없이 교만한 마음으로 그러한 일들을 용인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바울의 책망이죠.

 

두 번째 잘못은 그를 내쫓지 아니함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교회를 치리하는 과정 중에 징계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죄인을 치리하는 과정이 등장하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권고를 하다가 듣지 않으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의 입으로 확증케 하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교회 공동체에게 말하고 그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을 징계하고 파문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 회개 시키기 위한 오랜 참음과 사랑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의 양심이 바른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 가운데 계속 거하기를 원한다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린도 교회 공동체는 그러한 음행을 행한자를 용인하고 계속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그와 같은 죄악을 범한 이들이 한 사람 뿐이 아니라 더러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이 음란하게 신을 섬기는 행위들도 있었고, 해상무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돈을 쓰고 유흥을 즐기며 타락한 문화가 자리잡은 지역이었기에 이러한 일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지역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도 음행이라는 죄를 범한 이들이 꼭 같은 음행의 죄는 아닐지라도 비슷한 부류의 죄악을 가진 이들이 더 있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용인하고 너의 죄도 그렇고 나의 죄도 그렇고 그냥 좋은게 좋은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슬쩍 덮어두고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그 사람이 가진 영향력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던지 그 지역의 유지 라던지, 높은 명예나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어서 그 사람에게 함부로 직언을 하지 못하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 처지였기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고린도 교회 공동체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고, 그 문제는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큰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대해 바울은 3절에 아주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실로 몸은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자를 이미 판단하였다.

 

그리고 5절의 말씀을 통해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다. 라고 속히 치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말의 뜻은 단지 교회 밖으로 쫓아내어 세상에 거하게 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요, 또 다른 해석으로는 파문 이상의 징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도들에게는 신령한 권위가 있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 20절에서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내주어 그들로 훈계를 받게 했다는 말씀이 등장하는데 사도의 권위로 인하여 육체적인 질병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함으로 인해서 그의 육신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육체는 상하지만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귄위가 사도들에게 있었다는 해석도 있었다는 것이죠.

 

아마 육신을 멸한다는 위 구절을 통해서 위와 같은 방법들로 해석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만큼 이 죄악에 대한 심각성에 대해서 바울이 크게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이후 6절부터 8절의 말씀을 통해서 누룩을 인용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합니다.

 

누룩은 이스트, 발효시키는 물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누룩이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7절에 기록된대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인 것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누룩없는 새로운 피조물로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죠.

 

 

그 은혜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교회 공동체는 마땅히 이전의 습관, 묵은 누룩이 하는 습관을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새 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10절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교회 공동체가 피해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죄의 모양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들과도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음행하는 자, 탐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만일 너희가 계속 그런 이들과 어울리고 함께 한다면, 너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13절의 말씀은 위의 말씀을 한번 더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죠.

 

세상에 속한 이들을 판단하는 것은 바울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음행을 저지르던, 누구를 속이던, 우상숭배를 하던 그런 일과 자신은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나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여러분에 대해서는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치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에 속한 이들의 심판의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교회는 세상과 다른 거룩의 삶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교회 공동체가 할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우리의 행함이 거룩과 진실함과 순전함이 없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심과 같이 교회도 동일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바울은 4장의 말씀을 통해 너희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5장에 들어서는 너희가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음행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판단해야 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대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을 다룰 때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 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의로울 수 없듯이 우리모두는 죄인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지 우리가 의로움에 도달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고 죄에 노출될 수 있는 존재이며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연약함 이라는 위안에 빠져서 죄를 좌시하고 용인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에 드러난 죄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부분이지 용인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왜 너희가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통회 하고 회개하지 않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죄에 대한 경계가 사라지는 것은 교만에 빠지는 길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성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용서를 우리 마음대로 우리 기준대로 남용 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예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새롭고 산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이 땅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분별하여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들은 과감하게 내어버리고, 나의 죄악이 드러났을 때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또 지체의 연약함을 위해 중보하고 기도하며 온전한 몸을 이루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양심이 더 이상 피폐해지지 아니하도록 죄악에 물들어 다시 회복이 불가능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나의 영혼을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는 거룩을 향한 등불이 되어 이 등불이 꺼지지 아니하도록 경계하고, 공동체에 속한 지체가 죄악으로 어두워 질 때 등불을 비추어 함께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로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거룩의 모범과 본을 보이며,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과 행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등대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오라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 각 사람과 또 우리가 모인 공동체가 거룩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뻐하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삶을 기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로운 삶을 능력있게 영위할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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