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몰락 과정
(삼상 13:13~23)
예전에 빅뱅이라는 아이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지드래곤 멤버가 부른 노래 중에 삐딱하게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의 시작이 영원한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라는 가사로 시작하거든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연인이 헤어짐을 통보하자 나 삐뚤어질꺼야! 라는 내용의 노래인데요. 결국에 넌 변했지 라는 가사가 좀 인상이 깊어서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울이 변질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오늘의 본문은 사울이 왕이 되고 난 이후의 내용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사무엘상 12장에 사사였던 사울이 자신의 고별설교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며 지도력을 사울 왕으로 이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3장 1절은 사울이 왕이 될 때가 그의 나이가 40이고,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이년에 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2년이 된 이후의 배경이 오늘의 본문이 되는 것이죠.
13장 전반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2절에 보면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 삼 천명을 택하여서 그중에서 이천명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천명은 요나난을 위해 군사를 배정합니다. 이는 전쟁할 당시에 군사를 모집한 것과 성격이 다릅니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택하여 라는 문장 앞에 자신을 위하여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즉 사울이 택한 삼천명의 군사는 이방 나라와 같은 왕으로서의 직임을 드러내고 그 일을 수행하도록 할만한 필요한 정예 부대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곧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일을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기브아라는 지역을 지키고 있었는데 요나단이 블레셋의 국경수비대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이 사실을 듣고 사울이 나팔을 불어서 히브리 사람들을 소집합니다.
저번주 주일에 목사님 설교를 통해서도 들었지만 사울이 전쟁을 준비할 때 나팔을 불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전쟁을 준비했던 말씀을 들었죠.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번에는 블레셋이 먼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먼저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모든 군대를 소집하였다고 3절과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왜 요나단이 블레셋을 공격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지키고 있던 기브아 지역에 소규모의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자신들을 괴롭혔는지. 아니면 사울이 요나단을 시켜서 블레셋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는지, 아니면 요나단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는지는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4절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들었다. 라는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보아서 사울이 요나단을 시켜서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서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해서 대열을 갖추었는데 5절에 보면 병거가 삼만대, 마병이 육천명 군사는 해변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감지하고 굴이나 숲이나 바위틈이나 웅덩이에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요단강을 건너서 달아났고 사울을 따르는 병사들은 모두 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사울은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여 그들과 전쟁을 벌이려고 하였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의 본문을 보면 19절과 20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내려갔었는데
철공은 대장장이를 의미합니다. 대장장이는 철을 녹여서 철제도구를 만드는 이들인데, 이스라엘에는 대장장이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대장장이가 없던 이유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장장이가 세워지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예속이 되어 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리아에 경제제제를 했던 것처럼 블레셋은 강대국으로서 주변 나라들보다 뛰어난 기술력과 문명을 가지고 경제적, 군사적 우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철기시대에 진입한 블레셋은 당연히 다른 나라들보다 강하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철기를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제 무기도 없었으며 보습이나 곡괭이나 도끼나 낫 정도만 사용하였고 게다가 이 장비들을 갈 일이 있으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도구들을 맡겨야 했던 것이죠.
개역개정 성경 21절에는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때에 그리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은 이 도구를 벼릴 때, 무딘 날을 날카롭게 만드는데에는 삼분의 이 세겔이 들었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바른 번역입니다. 한 세겔의 값이 숫양 반 마리의 값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상당한 경제적인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 가족에 도끼나 채찍 괭이와 삽이 한 두자루 씩은 있었겠죠. 그런데, 이것이 국가적인 단위로 커져버리면 엄청난 값이되어버립니다.
왕이 되었던 사울이 이같은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탄원도 하였겠죠. 도대체 왜 우리는 대장장이를 만들 수 없냐. 왜 이렇게 막대한 돈을 들여다가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하는 곡괭이나 도끼를 갈아와야 하는가. 라는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왕으로서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아마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기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이 이와 같은 결단을 내린 것은 백성들의 탄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왕이 된 이후에 더 넓은 땅 더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도 그리하지만, 고대의 역사에서는 땅을 빼앗고 뺏기는 것이 비일비재했던 것이죠. 그리고 사울은 이미 전쟁에서 승리를 한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11장을 우리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들었지만, 암몬 사람 나하스의 도발을 들은 사울이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한데 모아서 암몬을 대파시켰던 기억이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얻었던 사울은 전쟁을 통해서 블레셋을 몰아내고 경제적, 군사적인 우위를 점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을 벌이려고 뚜껑을 열어보니, 블레셋은 이미 병거와 기마, 셀수 없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겁이 났던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본문 2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철기 무기가 있었고 다른 백성에게는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들고 싸워야 했던 것은 곡괭이 도끼 정도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편은 전쟁 무기를 들고 있으니 싸우면 질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가고 숨어서 벌벌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행한 일이 9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8절에 보면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라는 전갈을 보내었던 것 같습니다.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졌더라.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한 기간 내에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사울은 자신이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사울이 마음이 급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전쟁을 두려워하며 떠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생각한 궁여지책은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종교적인 행위를 시행함으로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가 끝나자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번제가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한 것을 보아 사무엘이 기한을 넘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당일에 이르지 않자 사울이 조급해진 것이죠. 사울을 만난 사무엘은 왕을 향해서 당신이 행하신 일이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이는 왜 당신 임의대로 번제를 드렸느냐? 라고 묻는 물음이었죠. 그러자 사울이 그 일을 변호합니다. 당신은 정한 기간에 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내게서 흩어졌고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창세기의 아담이 생각났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왜 먹지말라 명한 그 열매를 먹었느냐고 묻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당신이 만들어주신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 라고 말하며 그 책임 전가를 하나님께 하고 있던 아담이 생각이 났습니다.
사울도 자신의 잘못의 책임 전가를 사무엘에게, 그리고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오늘의 본문인 13절에서 사무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울이 지키지 아니한 명령은 단순한 제사법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법과 율례가 왕인 자신을 통하여 지켜졌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급박한 상황을 핑계삼아 이 원리를 지키지 아니하였고, 제사를 가볍게 여기었습니다. 제사를 가벼이 여긴 것은 곧 하나님을 가볍게 여김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군사적인 위험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울에게 있었겠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게 할 의무가 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방나라의 형태처럼 왕으로서의 권위와 목적을 완수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로 인한 심판은 이제 사울 왕조의 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심판의 말씀은 엘리 제사장 가문에 임했던, 그 심판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엘리의 자손들은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 때마다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자신의 자녀들의 악행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아니하였고 결국 그들은 가문이 멸망하리라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상 1장 17절에는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심함이었더라. 라고 기록되있음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으시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셨습니다. 제사를 잘못드렸던 엘리의 가문이 심판받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소홀하게 여겼던 벧세메스 사람들도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울도 사무엘을 기다려 번제를 드렸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신과 안위가 급급하여 자신이 제사를 집행하는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의 왕권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배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예법이나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태도와 중심을 바르게 할 것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습니다. 비록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워주셨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선택하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셨다는 말씀이 12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이미 나누었었죠.
인간적인 면에서 사울의 행동은 큰 문제처럼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사울은 왕이었고, 또 전쟁의 위협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제사를 집행하여 종교적인 평안을 주어야 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사울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엇보다 우선시 여겨야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상황을 합리화 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행위를 함으로 인해서 만족감을 누릴 수 있으며 나의 할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만족과 안위를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높여드리고 우리는 온전히 그의 소유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죠.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시편의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제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고백이 허울뿐인 고백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하게 바라는 믿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사울의 악함을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자 이전의 겸손함을 잊어버리고 그 권력을 쓰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욕심이 되고 올무가 되어 그의 왕권이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기뻐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능력 없음을 자랑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늘 기억하게 하여 주셔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