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는 장면과, 그리고 평지에서의 설교를 통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장면, 그리고 설교를 통해 축복과 저주에 대해 선언하시는 장면 이렇게 세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5장 후반부와 6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요. 오늘의 본문에도 그러한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이 등장하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는 장면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으로 전환 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대목이 오늘의 본문 중 제자들을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혹은 기도하러 가셨다 라는 기록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 예수께서 얼마나 기도와 묵상에 힘쓰셨는지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록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하시기 위해서 기도하기에 힘쓰셨음을 보면서 그 말씀을 대하는 우리도 기도와 묵상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는 이 장면을 아주 중요하고 또 자세하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4개의 복음서 중에서 오직 이 누가복음만이 제자들 중에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였다는 구절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 산에 올라가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면서 고심하셨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가 동일한 인물이듯이 누가는 제자들의 사도성을 드러내면서 이후에 등장할 사도행전에서 부여될 사도들의 사역과 사도의 직임을 미리 강조하는 그런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특별한 의미는 아마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공동체를 인도해 나가야 하는 사도들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조금 더 특별하게 고심하면서 기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 중에서 열두명을 뽑아 사도의 직임을 부여 한 이후에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와 설교를 하십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지 마자 예수님을 기다렸던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 그리고 말씀을 듣고 병고침을 받기 위해 모인 무리들, 또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과 치유의 능력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었음을 19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라고 기록되었듯이,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음을 입었던 사건이 그날만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고 치유가 되는 놀라운 일들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 중에 치유 사역을 밝히 드러내는 구절이기도 한데요.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병자들, 또 귀신들린 자들이 있었지만 성경을 대하는 모든 독자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나는 병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귀신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지금 비록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고,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연약한 존재입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사탄의 영적인 공격이나, 나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낮은 자존감이나 다듬어지지 않은 연약한 인격 등등 우리는 모두 다 온전함에 이를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더 신실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과 결핍을 채워주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뿐이기에, 현재 나의 상황이 아무렇지 않고 괜찮아 보일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본질상 우리는 죄로 인하여 타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 존재 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저 살아지니 살아가는 의미없는 존재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17절 18절에서 기록한 대로 다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의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면서 은혜를 간구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후에 예수님의 실제적인 율법 강화 설교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보통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5장부터의 설교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20절에서 26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선택한 사도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여 예수님을 따르던 예수님의 추종자들, 그리고 설교를 듣기위해서 모인자들, 그리고 병 낫기를 위해서 모인자들 모두를 의미합니다만, 특별히 누가는 제자들 이라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서 위에서 말했듯이 제자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구분짓고 대비하는 어법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제자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을 대비시키는 이유가 분명히 있는데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찌보면 기득권을 행사하고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얻어진 부와 명예를 가진 자들의 대표성을 띄고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권력을 버리고, 부유함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의 대표성을 띄기에 그렇습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좇았으므로 이 땅에서의 부유는 너희에게는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가난한 이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복이 있을 것이라는 선포를 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린자는 복이 있다. 우는 자는 복이 있다. 버림받을 때에는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네 가지 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이 땅에서의 삶의 가치를 포기할 때 발생합니다. 베드로와 레위를 부르실 때 그들이 했던 행동을 기억하십니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이유는 앞으로는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는 또 자연스럽게 주릴 것입니다. 풍요로운 식탁 대신에 끼니를 걱정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지금 괴로운 삶을 살며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또 마지막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받게 되는 멸시와 조롱, 미워함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실제적인 삶의 자리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하지만 가난하고 주리고 울며 미움받는 이들의 삶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너희가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며, 너희는 배부를 것이며 또 웃을 것이며, 미움받을 때 복이 있으니 기뻐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그 축복의 말씀이 이 땅에서 누리게 되는 부유는 아닐지라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면 받게될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실 내세적인 말씀으로만 이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고 ‘천국’이라고 하는 다른 세계에서 이루어질 이야기로 해석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참고 견디며 죽음 이후에 찾아올 하나님 나라, 혹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로 해석이 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비단 내세적인 말씀으로만 끝나는 축복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축복이기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가난한 이들을 품어주는 교회 공동체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주린자들을 먹이는 교회공동체의 돌봄을 통하여 그들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눈물 흘리는 자들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웃음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예수그리스도 인하여 박해받고 미움받는 이들은 교회 공동체를 통해 환대와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공동체에 소속된 각 개인은 자신에게 맡겨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제자도를 따라 제자된 삶을 살아가야 하고, 또 연합되어진 공동체는 한 사람, 한 사람 세워져가는 제자들을 공동체 안으로 품어 하나님 나라의 복을 채워가야 합니다.
지금 이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이 말씀은 내세와 이생에서 함께 누릴 수 있는 복임을 기억하고 해석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네 가지 복에 대해서 선언하시고 곧바로 대비되는 네가지 화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네 가지 화는 이전에 선언하셨던 복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말씀입니다.
부요한자여, 배부른자여, 지금 웃는자여, 칭찬받고 있는 자여 너희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요한자는 이미 위로를 받았고, 배부른자는 주릴 것이며, 지금 웃는자는 애통하며 울 것이고, 칭찬받는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받게 되는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화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부요한 죄인들을 부러워하지만, 그들에게는 화가 선포되었습니다. 화가 선포된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복과 부유에 행복을 걸고 이미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위로를 이미 받았기에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받게되는 복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화를 받게 되는 것이죠.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서 묵상하게 하고 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정은 이 땅에서 주는 부유함에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추구함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뜻 안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에 힘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신 교회로 모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공동체가 예수님과 함께 나아가야 할 비전과 방향성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참된 제자도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제자도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내가 주저하게 되는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영역이 있으신가요?
질문2.
내가 생각하는 복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을 참된 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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