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
사도행전 10:17~33
384 나의 갈길 다가도록
어제 본문을 통해서 환상을 본 고넬료와 또 다른 환상으로 베드로를 인도하신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고넬료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그의 선한 행실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셨고 또 그의 즉각적이고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이 있었음을 묵상하였죠.
어제도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믿음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되시는 것이죠. 세상에는 많은 철학과 가르침이 있고 시대정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깨달음은 있을 수 있으나 생명은 없습니다.
참된 생명은 기록된 말씀, 창조적 언어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고 능력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믿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우리의 순종과 행함으로 이루어짐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요.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음성, 그리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들은 이후에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도 환상이나 예언이 주어질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적인 질서 안에서 바르게 해석되어지는 것이 중요하죠. 베드로도 이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환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그때 고넬료가 보냈던 세 사람, 개역개정에는 두 사람이라고 번역되었는데 다른 사본에는 세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제의 본문에서도 고넬료는 자신의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 한 사람 이렇게 셋을 베드로에게 보내죠.
그 세사람이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도착합니다. 무두장이는 가죽공예를 하는 피혁공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재미있는게 시몬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찾아와서 거하는 것도 두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사람이 너를 찾으니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자 베드로가 내려가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납니다.
내가 베드로인데 무슨일로 이곳에 온 것인지를 묻자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그들의 주인인 고넬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는 의인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뿐 아니라 온 유대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인데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초청하라는 말을 들어 오게 되었다고 말하죠.
베드로가 그들의 말을 듣고는 좀 의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이 말하는 의인의 기준은 율법 준수의 기준에 따라서 구분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유대교 사람도 아니고 더욱이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 군인이었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로마 군인에 대한 반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환상을 보고 나를 찾아왔다지만 자기 민족을 압제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환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상대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도 거리끼는 일이죠.
그래서 다음장인 11장을 보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실을 두고 베드로를 향하여 무할례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여 베드로가 이 사건을 설명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비난을 받을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나의 어떤 행위로 인해서 나를 비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일을 피해가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더라도 우리는 사회적인 위치와 관계를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치와 판단에 대해 신경을 무던히 쓰고 있기 때문이죠.
베드로도 유대인으로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수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실하게 신뢰하고, 또 눈 앞에 서 있는 이방인들을 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를 만나러 삼일에 걸처 가이사랴 지방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고넬료를 만나죠. 고넬료도 혼자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두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고넬료의 이 같은 행위는 그가 보았던 환상을 굳게 믿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척과 친구들까지 모아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보여주신 이 환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함께 경험케 하고자 했던 마음인 것이죠.
만약 고넬료에게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과 또 여러사람을 구제하던 그 사랑이 없었다면 자기와 자기 가족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친척들과 친구들까지 집으로 초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으며 함께 그 은혜를 나누고자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실 가까운 사람일 수록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체면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관계가 틀어질까봐,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따르고 믿는 이 믿음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미개하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환경을 뛰어 넘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해야 합니다. 먼저는 고넬료처럼 그 믿음에 확신이 있어야 하겠죠. 또한 나의 삶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는 좋은 통로로, 그릇으로 나를 가꾸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고, 또 내 삶에 선한 열매들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달한다 할지라도 선한 반응을 이끌어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말이라면 내가 한번 들어봐야겠다. 저분의 말씀이면 내가 믿을만 하다. 라는 삶의 자세까지 성숙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숙명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보자마자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알아보았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보자마자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로마 사람이 절을 하는 것은 로마황제를 알현할 때나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위치와 상태로 봤을때도 누가봐도 고넬료가 더 상위직급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텐데 오히려 고넬료는 자신이 엎드려 베드로를 영접합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천사가 말해주었던 사람이 이 사람인 것을 깨달은것과 동시에 특별히 구별되고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겠죠. 그러자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라. 라는 말을 전합니다.
이는 당시 고넬료가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단지 베드로가 겸손했기 때문에 아이고 뭘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라는 수준의 인사치례가 아니라 로마 군인으로서 황제 숭배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고넬료와 모인 로마인들에 대해서 서로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뿐임을 가르쳐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내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줄을 너희도 알겠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셔서 너희의 부름을 사양하지 않고 내가 왔으니 어찌하여 나를 불렀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고넬료가 환상중에 보았던 내용을 베드로에게 말하면서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겠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후에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복음을 이방인의 집 고넬료의 집에서 가르칩니다.
어제는 고넬료에 대해 묵상했다면 오늘은 베드로에 대해 묵상할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은 당연히 사도니까 하나님이 가라시면 가야하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로서 그가 위임받은 사역이 사도로서 대표성을 띄고 또 성경에 기록되었고, 성령이 충만하였으며, 많은 기적과 이적이 나타났고 성령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도가 아니고, 나는 목사나 전도사도 아니고, 나는 세상에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때로는 죄를 짓기도 하고 내 삶에는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지도 않으며 성령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이나 음성이 없으니 무엇에 순종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라고 혹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순종하지 않을 수 있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기에, 이방인들에 대한 반감이 없을 수가 없었죠. 자기 민족을 압제하는 이들을 좋게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환상중에 음성을 듣기는 했으나 그 감동을 무시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자기가 받아야 할 비난에 대해서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야 지구촌이 하나가 되어서 외국에 여행도 다니고 외국인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지만 이 당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함께 먹고 자고 교제하는 것은 율법에 의거하여 민족 가운데서 끊어지고 매국노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을 더욱 우선 하였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더욱 집중하여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의 성장은 순종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부어주시는 감동과 감화에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죠.
우리는 어떤 환상을 보지 않아도 이미 기록된 말씀이 예언의 성취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나가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할 사랑과 용서 혹은 희생과 포기의 위대한 가치들이 우리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죠. 이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가운데 또 교회 공동체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베드로의 순종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감동하시고 또 말씀으로 깨닫게 하신 성령님의 마음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고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합심해서 기도하실 때, 성령님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감동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셔서 말씀이 살아서 우리에게 들려지는 생명력 있는 말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무미건조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또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순종할 수 없는 환경과 상황과 가치판단이 다가올 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참된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공동기도제목인 구교회성전 매각과 김영재 담임목사님을 위해서 또 여러분의 개인기도제모을 위해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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