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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끝과 시작

by 터틀곽 202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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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하나님 말씀을 나누기에 앞서서 저번에 받으셨던 영적인 자녀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계시시

? 저도 문 앞에 붙여놓았는데 오며 가며 얼굴을 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자녀들을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벌써 2020년이 다 지나갔습니다. 정말 믿어지지가 않을 만큼 빨리 시간이 흘러간 것 같습니

.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맘때가 되면 의례적으로 한해를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를 정산하곤 하

. 1차적으로는 연말정산을 합니다. 저는 아직 한 번도 해본적은 없지만 직장생활 하시는 분

들은 연말정산을 하시죠. 13월의 월급이라고도 하더라고요. 또 어떤 정산을 할까요? 한 해 동

안 내가 세웠던 계획이 잘 이루어졌는지. 나에게 의미 있는 한 해 였는지를 정산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관계를 정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온라인 관계들이 많잖아요. 가끔

카카오톡을 보다보면 이사람이 누구지? 하는 사람들이 다들 있으실 겁니다. 그래서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부터 인터넷에서 맺어온 친구들도 싹 정리하는 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 6학년에 졸업을 합니다. 입학과 졸업이 있는 것이죠. 회사도 그렇

습니다. 입사가 있으면 퇴사가 있습니다. 저도 곧 퇴사를 합니다. 이날을 바라보며 열심히 근

무했습니다. , 사업하시는 분들에게는 창업이 있으면 폐업이 있습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

습니다.

 

그런데 조금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히브리인들의 관점은 우리와 조금 다른데요.

그들은 끝을 이야기 하고 그 다음 시작을 이야기 합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를 살펴보면 히브리인들의 생각을 살짝 엿볼 수 있는데요. 천지 창조가 이

루어질 때 모세오경의 저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쨋날이라 라고 기록하면서 저

녁을 먼저 이야기 하고 그 다음 아침을 이야기 합니다.

 

보편적으로 우리의 하루의 시작은 언제인가요? 일단 아침이 되어 눈을 떠야 하루의 시작이 되

고 그 다음 밤이 되어 저녁에 눈을 감아야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녁에

헤어질 때 인사가 안녕히 주무세요. 오늘 하루 마무리 잘 하세요. 아닌가요?

그런데 히브리 인들은 저녁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아침을 이야기합니다. 저녁에는 무

얼 하나요? 네 잡니다. 자는거에요. 저녁이 가진 의미가 또 있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서는 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 6학년에 졸업을 합니다. 입학과 졸업이 있는 것이죠. 회사도 그렇

습니다. 입사가 있으면 퇴사가 있습니다. 저도 곧 퇴사를 합니다. 이날을 바라보며 열심히 근

무했습니다. , 사업하시는 분들에게는 창업이 있으면 폐업이 있습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

습니다. 그런데 조금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히브리인들의 관점은 우리와 조금 다른데요.

그들은 끝을 이야기 하고 그 다음 시작을 이야기 합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를 살펴보면 히브리인들의 생각을 살짝 엿볼 수 있는데요. 천지 창조가 이

루어질 때 모세오경의 저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쨋날이라 라고 기록하면서 저

녁을 먼저 이야기 하고 그 다음 아침을 이야기 합니다.

보편적으로 우리의 하루의 시작은 언제인가요? 일단 아침이 되어 눈을 떠야 하루의 시작이 되

고 그 다음 밤이 되어 저녁에 눈을 감아야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저녁에

헤어질 때 인사가 안녕히 주무세요. 오늘 하루 마무리 잘 하세요. 아닌가요?

그런데 히브리 인들은 저녁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아침을 이야기합니다. 저녁에는 무

얼 하나요? 네 잡니다. 자는거에요. 저녁이 가진 의미가 또 있습니다. 잠을 자기 위해서는 어

두움이 필요합니다, 어두운 것, 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 과연 어떤 것이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나요? 맞습니다. 빛이 긍정적이죠. 잠들었음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천지가 창조되기 전 창세기 1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기전에 성경은 혼돈과 공허함 흑

암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절망과 어두움과 혼돈을 넘어에 다다를 빛과 소망과 희망의 아침을 기다

리는 것,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개념이었습니다. 우리와는 좀 다르죠.

제가 잠시 히브리인들의 개념을 말씀드린 것은 오늘 본문과도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

.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부르시는 방법과 상황이 다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때는 그

의 나이가 75세때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거라를 시작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나 애굽 사람으로 왕궁에서 살다가 나이 마흔에 애굽 에서 도

망쳐 나와 광야에서 40년간을 양을 치다 부름을 받았으니 80세가 되어서야 부름을 받았습니

. 사무엘은 한나의 서원으로 인해 젖을 뗀 이후 성전에 드려진바 되어 선지자가 되었고 이

사야는 환상 중에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

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은 각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특별한 상황과 특별한 계시로 불러주셨음

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요

 

오늘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도 독특하십니다. 오늘 본문인 5절을 다시 한 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

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있노라 하시기로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예레미야를

부르셨을때의 나이가 14세에서 20세 사이 정도 될 것이다 라고 추측을 합니다.

6절에 보면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

나이다 하니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자신이 자신 스스로 아이라 지칭하는 것을 보아 중년이나

노년의 나이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신적인 존재가 다가와 한 영혼을 부르실 때에 얼마나 큰 떨림이 있었을까요? 

레미야 본인은 그 당시에 알 수 없었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한 자신의 사역이 특별히 성

경이 기록되어져가는 역사 속에 있었기에 그 떨림이 무척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한 예레미야를 향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예레미야를 안심시키

시고 평안케 하심을 볼 수 있는데요. 오늘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으로 예

레미야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너를 모태에 짓

기전에 너를 알았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데요. 아기는 생물학적으로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

자가 만나서 착상되서 만들어진다고 알고 있지만 성경에서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지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은 아빠의 정자도 아니고 엄마의 난자도 아닙니다. 

론 생물학적으로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맞지만 실제로 그 창조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우리의 몸을 만드시고 우리를 조성하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는 존재는 없으며 의미와 목적이 없이 창조되는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

은 이를 여러 번 성경에서 계시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창조라는 단어는 하나님으로부터만 말

미암은 단어입니다. 무언가를 제작하고 주조하는 것이 아닌 창조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통해서

만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1 16~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님에 대한 말씀 인데요. 모든 만물이 예수님 곧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음을 기록하고 있

습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밝히 말씀하셨듯이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고 조

성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지만 단순히 여러 번 들어서 지식적으로 학습되어져서 아는 영역이 아

니라,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고백되어지는 영혼의 고백, 믿음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알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한 창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짓기 전에 너를 잘

알고 있었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너를 향한 계획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내가

너를 잘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야다 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몇 번 들어보셨던 단어일 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여 안다 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요. 아마 여기에서 낚시를 모르시는 분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낚시 다 아시죠? 낚시

는 무엇인가요? 강이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낚시라고 하죠. 낚시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찌낚시 릴낚시 대낚시 루어낚시 등등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의 설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다 낚시에 대해서 듣고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낚시를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경험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

. 저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따라 종종 강낚시를 갔었는데요. 강낚시에서 정말 중요한게

찌라는 거에요. 물에 찌를 세워서 물고기가 바늘에 있는 먹이를 먹으면 찌가 미세하게 움직입

니다. 그러면 그 찌를 잘 지켜보고 있다가 찌가 쑥 올라오거나 쑥 내려가면 째빨리 챔질을 해

야 물고기를 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찌를 세우려면 물의 깊이를 가늠해야 합니다. 

깊이에 맞추어서 낚시 추를 얼만큼을 달아야 하는지를 파악해야하죠. 또한 물고기를 낚기 위

해 미끼는 어떤 종류를 써야 하는지도 다릅니다. 떡밥을 써야하는지 지렁이를 써야하는지 인

조미끼를 달아야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물의 흐름을 파악해야 하고 물고기들

이 있는 포인트를 알아야 하죠. 그리고 실제로 낚시를 던져서 찌가 바르게 세워지는지, 그 물

고기가 내가 사용한 미끼를 좋아하는지 낚시줄은 몇호짜리를 써야 하는지 등등 이러한 내용들

은 실제적인 경험을 겪어봐야지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소윤이와 은지에게 너희 낚시 알지? 네 알아요. 자 그럼 출발 이라고 해서 낚시

대를 준다고 소윤이와 은지가 낚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가서 여러 번 낚시를

경험해보아야 하고 물고기도 잡아보아야 하고 그러면서 낚시가 몸에 체득이 되면 비로소 아

내가 낚시를 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체득하여 깨달아 알아지는 것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야다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죠. 모태에 조성도 되기전에, 아직 창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경

험하여 알고 있다는 뜻인 야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우리를 알고 계시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아니, 안다고 했을 때는 서로의 사귐이 있고

교제권이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야지 아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나를 경험하여 체득하여 아신다

고 야다라는 단어를 쓰시면서 나를 아셨다는데 내가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나를 어떻게 아신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공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1 3절에서는 이렇

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

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조성되기 직전이 아니라 아예 천지를 창조하

시기 이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하나님을 믿었다.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

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나를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나를 찾아와 주

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 믿어야지. 내가 신앙생활 잘해야지 내가 하나님을 알아야지 라는 것은 사실 주체

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주시고, 하나님이 힘

주셔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범하는 착각과 오류가 무엇이냐면 내가 나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안에서 창조되었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아서 공부해서 교회에 다녀서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

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별은 남, 녀의 성별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선지자로 세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하나님이 이렇게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와 성경

이 기록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구별하시고 부르시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요. ! 나도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불러주시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예전에는 정말 저러한 부르심을 너무나 사모했습니다. 

나님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나요? 아니면 목회자로 부르셨나요?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으면 어

느 나라로 저를 보내실 건가요? 말씀해 주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면서 정말 간절히

간절히 기도했거든요. 그런데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왜 하나님은 나에게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예레미야처럼 말씀하지 않으시는가! 라고 생각하던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중국으로 부르셨어. 하나님이 나를 인도로 부르셨어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부르셨어 라고 말하는 동종업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는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습니

. 왜냐하면 저는 그런 부르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생각은요. 아 하나님이 나를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예레미야처럼 안 불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라는 생각도 불현 듯 들었습니다. 그랬으면 꼼짝없이 그 일을 해야

하잖아요. 얼마나 무서운 아버지 입니까. 에스겔처럼 그 예언자적 삶을 살아야 하기 위해서

똥에 떡을 구워서 먹으라는 말씀을 하셨다면 과연 내가 순종할 수 있었을까.

 

왼쪽으로 누워서 삼백구십일동안 자고 오른쪽으로 누워 사십일 동안 누워서 자라고 했으면 얼

마나 괴로웠을까 잠도 내 맘대로 못자고, 밥도 내 맘대로 못먹고 하는 그 일에 내가 아니라

에스겔을 부르셔서 참 다행이다 라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습니다.

믿음 없어 보이는 소리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이게 큰 믿음입니다. 시키지 않아도 하는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농담 같은 이야기지

만 그러한 생각도 해보게 되더라고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예레미야처럼 부르시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구별하지 않

고 내버려두셨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예레미야를 그렇게 부르셨듯이 우리를 향한 부르심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

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창조하기도 전에 이미 아시고 또 그렇게 창조하시고 구별하여 하나님

의 일을 위해 세우신 것은 예레미야가 너무나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예레미야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고,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와 역사 가운데에 우리 각 개인을 부르셨다는 말이기

도 합니다.

 

이제 예레미야를 넘어 우리 각 개인에게로 그 시각을 돌려봅시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2020년을 마무리 하는 12월 마지막 주에 여러분은 또 나 개인은 어떤 존재이며 누구로 살아

가고 있습니까?

 

아 올해도 나는 아무 의미 없었어. 올해도 나는 실패했어. 코로나 때문에 아무것도 못했어 오

히려 망했어. 나는 변한게 없어. 상황은 더 악화되었어. 나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미래는 암울해. 예전의 내 모습이 그랬듯이 나는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어.

너무 부정적인 모습을 그렸나요? 이 부정을 그대로 긍정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올해는

너무 행복했어 올해도 나는 승리했어 코로나가 있었지만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어

나는 변화되었어 상황은 역전되었어 나는 점점 더 나아지고 있어 내 미래는 정말 기대되. 

금까지 인도함을 받았듯이 나는 앞으로도 인도하심 속에 살아갈거야.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속해 계신가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전자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후

자의 인생을 그저 바라만 보고 꿈만 꾸며 살아가고 계시진 않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끝과 시작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히브리인들의 사고방식

을 전달해드리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 혼돈과 어둠속에서 빛을 창조해 내신 하나님

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나의 지난날이 어찌 되었건, 어둠과 혼돈과 고통속에 있었건 우리를 빛과 소망가운데로 이끌

고 계신 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 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모태에 짓기도 전에 우

리를 아시고, 구별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을 분명히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

니다. 그러면 우리는 끝난 것 같은 인생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듯이 우리는 다시 일어나 달려나갈 수 있는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 생활을 할 때였는데요. 추운 겨울에 파견근무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보통 큰 훈련을

하다보면 부대 설정을 하면서 지원을 나가기도 하는데요. 타 부대 훈련에 통신지원을 나갔었

는데 파견 인원이 적어서 야간 경계 근무를 좀 길게 서야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한

겨울에 경계근무를 서는데 너무 너무 추운 거에요. 그것도 새벽 5시 반 부터 아침 8시까지 근

무였는데 깜깜한 새벽에 너무 너무 추웠습니다. 게다가 작전 지역이 야산이라 차디찬 산등성

에 몸을 기대고 경계 근무를 섰습니다. 옷을 그렇게 껴입었는데도 야산에 불어오는 칼바람에

온 몸이 경직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무 너무 추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너무 추워서 그렇게 오돌 오돌 떨고 있는데 제가 너무 떨고 있으니까 간부였나 고참이었나 기

억은 잘 안나는데요. 춥냐? 조금만 기다려 해 뜬다 그러는거에요. 속으로는 뭔 소리야 지금

얼어 죽겠는데 해 뜬다고 뭐 달라져? 해떠도 추운건 다 똑같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리고나서 진짜 한 30분 뒤에 해가 떴어요 그러면서 햇빛이 살짝 비춰오는데 정말 그 햇살이

너무 따뜻한 거에요. 몸이 사르르 녹는건 아니었지만 아 이제 살았다.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 햇볕이 너무나 따뜻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두움에 거했던 인생일지라도, 밤과 같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망 없는 인생

같을 지라도 끝장 난 것 같은,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인생일지라도, 빛이 오고

아침이 분명히 다가올 인생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 전에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를 구별하여 부르신 이가 우리 하나님 우리

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직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며 이 어두움의 시간이 언제쯤 끝날지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이것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끝을 넘어 새로운 시작으로 어두움을 넘어 빛나는 아침으로 나아가는 우리 오라가족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이제 2020년을 보

내고 새로운 2021년을 맞이해야할 우리 모두에게 이 말씀이 희망과 빛과 새로운 시작을 기대

케 하는 말씀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신 은혜가

우리와 늘 함께 계셨기에 우리가 지금도 살아 호흡하며, 이 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음을 고

백합니다. 이제 2020년도 주의 은혜 안에 지나보내며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려 합니다. 뒤돌아

보면 참 부족하고 연약한 것 투성이 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긍휼로

인하여 살게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나아가 이제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으로 소망으로 희망을

향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한해가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와 각 가정위에 놀라운 하나님의 빛이

임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새로운 날을 기대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

지는 못하지만 우리 교회 건축을 위해서 각 가정에서 또 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건축을 붙들어 주셔서, 지금 이 시대 속에 우리 교회가 꼭 감당해야할 처소가 준비되게 하시

고 그 공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건축위

원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부어주셔서 우리의 생각보다 크신 하나님의 지혜로

이 건축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지금 코로나로 인해 함께 모여 예배

하지 못하여 믿음에서 멀어진 지체들이 있다면 한 영혼 한 영혼 기억하여 주시고, 이 기간을

통해 나의 믿음의 현 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하셔서, 이러한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하는

신앙을 가진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로 함께 하여 주옵소서. 다시 함께 모여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

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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