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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다윗

by 터틀곽 2023.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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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다윗

(사무엘하 6:16~23)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이후 자신의 민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올라온 블레셋을 무찌르고 나서 그 다음으로 행하였던 일이 바로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본래 이 궤는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사울의 때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되죠. 하지만 이방인에 땅에 있었던 여호와의 궤로 인해서 그들에게 재앙이 임하자 그 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그 궤가 이스라엘로는 돌아왔지만 벧세메스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궤를 들여다 보다가 오만 칠십명이 죽임을 당했죠. 그리고는 그 궤를 산에 살고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깁니다. 이 아비나답은 기럇여아림에 거주하는 유다지파의 자손인데요. 그 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사울은 자신이 왕으로 있을 때도 이 언약궤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다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겠죠.

 

하지만 사울의 때, 그가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는 유다의 변두리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있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 다윗 성에 모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죠.

 

어제의 본문을 보면 아비나답의 집에서 궤를 옮기려다가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리고선 오벧에돔의 집으로 언약궤가 들어가서 그곳에서 삼개월동안 머물게 되죠.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오벧에돔이 가드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가드 사람은 블레셋 사람을 뜻합니다. 이 전에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있을 때는 다곤 신상의 머리가 떨어지고 그들에게 재앙이 임하였었는데, 이번에는 블레셋 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의 영적인 사인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준비를 하고 궤를 옮기는 방법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서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16절에 보니 궤가 다윗성으로 입성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갈은 사울의 딸이죠. 미갈은 다윗의 첫 번째 부인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있어서 미갈의 위치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왜냐하면 왕위의 정통성에 대해서 미갈이 사울의 친딸로서 주는 위치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다윗도 아브넬이 항복하러 왔을 때 미갈을 데려오라고 명령한 것도 어느정도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미갈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창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만 보아도 사울의 집안이 여호와 신앙이 잘 계승되지 않았음을 보게 되죠.

 

여호와의 언약궤가 성으로 입성할 때 미갈은 성문 밖까지 나아가 언약궤를 맞이했어야 함이 좀 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런데 창으로 내다보았다는 것은 언약궤가 들어오는 그 사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죠. 성 안에서 내려다보며 시큰둥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춤울 추는 다윗의 모습을 보고, 다윗이 대충 춤을 춘것도 아닙니다.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 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행위가 왕 답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20절에 기록되어 있죠.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미갈은 다윗을 조롱하듯이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오늘 어찌나 영화로우신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방탕한 자가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행하셨다. 라고 말하죠. 미갈은 이 말을 통해서 다윗의 왕으로서의 체면과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출신이 천한자들처럼 행하였다는 말을 전함으로서 다윗의 가문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미갈은 왕가에서 태어나 왕족의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늘 백성 앞에서 높임을 받고 예절과 전통을 배웠겠죠. 물론 사울 왕조가 역사적으로 오래 된 가문은 아니었지만 왕의 가문으로서의 자세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통과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갈을 향해서 다윗이 무어라 이야기 합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왕으로 삼으셨느지를 이야기 하죠. 21절의 기록입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자신의 출신을 업신여긴 미갈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의 온 집을 버리고, 나를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나는 이 기쁨을 표현하여야겠다. 내가 뛰어놀아야겠다. 내가 이것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를 천하다고 여길만큼 되더라도 나는 이 기쁨을 표현하겠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같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사울의 가문이 멸망하였기 때문이 아니죠. 다윗이 기뻐했던 그 이유는 사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다윗성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자신의 왕으로 있을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기쁨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렇게 춤을 추며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뻐하였던 것이죠. 그리고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이스라엘 무리들에게 떡과 고기와 건포도를 나누어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만 하나 된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과도 연합되었음을 선포하는 기쁨과 축제의 날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후에 기쁨과 감격에 찬 다윗이 이제 가족을 축복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미갈을 통해서 들은 그 이야기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던 것이죠. 그리고 미갈은 다윗을 조롱한 그 댓가로 인하여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말씀으로 6장이 끝납니다.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것은 그 이후로 다윗이 미갈을 찾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두 가지 질문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기뻐한 적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 나의 체면과 체통과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요즘은 우리가 찬송가만 부르는게 아니라 복음성가도 부르고 현대적인 씨씨엠도 부르고 그렇습니다. 씨씨엠중에 이런 찬양이 있어요. 나는야 다윗처럼 춤을 출거야 사람들이 비웃어도 나는야 다윗처럼 춤을 출거야. 이 찬양이 불려진지 좀 됐습니다. 제가 청소년기, 청년 때 나온 찬양 같아요. 수련회에서 마지막 셀러브레이션 때 이 찬양을 종종하는데요. 아이들이 막 춤을 춰요. 신나합니다.

 

그러면 저는 뒤에서 이렇게 지켜보면서 저 감정에만 요동치는 저 신앙이 얼마나 가려나, 저게 진짜 하나님을 기뻐하는건지 자기 흥에 취한건지 자기들이 제대로 알까? 하면서 판단하고 있더라고요. 꼭 누구와 같냐면 미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의 행위는 박수치는 것 정도입니다.

 

두 번째로 나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 나의 체면과 체통과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면서 춤을 춰본 적도 없고, 춤을 출 일도 없으니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이 참 불쌍하고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에 내가 참 인색한 사람이구나. 나는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얼마나 기뻐하며 표현해 보았나?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여기서 일어나서 막 춤을 추고 그런다면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저는 그래도 그나마 좀 낫죠. 저희 목사님이나 안수집사님께서 일어나셔서 예배시간에 막 춤을 추신다고 상상해보세요. 상상이 잘 안되시죠? 왜 상상이 안될까요? 그리고 왜 상상만해도 민망한 생각이 들까요?

 

그것이 다 우리의 미갈과 같은 체면과 전통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또 유교적 문화이고 체면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긴 해요. 그리고 무조건 뛰놀고 춤을 춰야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또 아니잖아요? 하지만 우리가 얼만큼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는지는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감정을 표현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더욱 우리의 신앙생활이 유익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감정만 앞세운 신앙생활은 건강하지 않다고 보여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아예 배제시키는 신앙생활도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기쁨을 기쁨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더욱 어린아이와 같이 솔직할 수 있는 것이죠. 사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킬만한 체면이라는게 있을까요? 가끔은 체면을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부끄러우시면 집에서라도 춤을 추며 찬양해보면 어떨까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체면과 체통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온맘 다해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구원 앞에서 춤추고 뛰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그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왜 미갈은 다윗처럼 기뻐하지 못했을까요? 미갈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질문2.

나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기뻐해본적이 있으신가요?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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