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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가, 아닙니다.

by 터틀곽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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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은 가, 아닙니다.
마가복음 10:13~16



옛날 기억을 좀 더듬어보면요. 만물상 사장님이 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골목 골목을 다니며 물건을 판매하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자주 들려왔던 멘트중에 하나가 애들은 가라~ 애들은가 였습니다. 판매하시는 사장님은 이 멘트를 그냥 추임새처럼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뭐 몹쓸 것을 팔고 다닌 것도 아닌데 애들은 가라고 말했던 것은 아이들이 와서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것 저것을 만지고 다니는 그런 상황이 싫어서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말씀드린것은 80년대 이야기 이고요. 현대사회에서도 애들은 가는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바로 노키즈 존이 현대판 애들은 가 입니다. 아이들이 떠들고 뛰어다니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예 초등 저학년 미만 까지는 받아주지 않는 식당, 카페, 전시회 등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제주도에는 노키즈 존이 좀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사진 하나 띄워주시겠어요? 여기 지도가 제주도 노키즈존을 시행하는 음식점과 카페 목록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려볼게요. 노키즈존 음식점, 카페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번. 사장님이 아이들을 싫어한다. 2번 대한민국 정서가 아이들을 싫어한다. 답이 무엇일까요? 음식점과 카페가 노키즈 존이니 1번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사실은 2번입니다. 대한민국 정서가 아이들을 싫어합니다. 노키즈존이 생기는 이유는 카페를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컴플레인 때문입니다. 사실 소원이 진언이도 어렸을 때 커피숍에서 시끄럽다고 쫓겨난 적도 있고요.

예전에 송탄침례교회에서 제주선교를 하러 왔을 때 저녁 집회 때 진언이를 데리고 참석했다가 교역자가 애를 데리고 나가라고 그래서 집회중에 쫓겨난 적도 있습니다.

의아하시죠? 그럴리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거라 생각이 들어요. 안그래도 대한민국은 지금 위기중의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향후 70에서 100년 이후로는 국가가 소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금 합계출산율이 0.778명이라고 해요. 2015년부터 꾸준히 내려가고 있습니다. Oecd 국가중 최하위 입니다. 재밌는 영상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개그맨들이 하는 풍자인데요 10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극단적으로 상황을 만들어보는 영상입니다.

좀 극단적인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상해볼만한 상황입니다. 실제로 3월에는 충북 진천에서 3년만에 아기가 태어나자 한덕수 국무총리가 돌잔치에 참석을 하기도 했고요. 통영에서 열린 돌잔치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위와 같은 상황이 안 일어날 법이 없는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어린아이를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가 그 누구보다 이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겨야 할 상황인데 신기하게도 사회적인 상황은 아이들을 멀리하는 상황인 것이죠.

오늘 성경에 기록된 본문도 좀 비슷한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가에서 무리를 모으시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자기 아이들을 데려와서 예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공회당으로 데려가서 랍비의 안수를 받기도 하였는데요.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랐던 유대인이었다면 예수님께 자녀들이 안수를 받도록 하고 싶었겠죠.

그런데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무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애들은 가~ 애들은 가~ 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죠.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름대로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느라 매우 바쁘셨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을 심하게 나무랬던 것이죠. 지금 우리 선생님께서 얼마나 바쁘신데 이런 어린 아이까지 데려오느냐. 여기 병들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우선이다. 지금 말씀을 전하시느라 얼마나 바쁘신지 안보이냐? 무슨 애들까지 데려와서 예수님을 피곤하게 만드느냐? 등등의 얘기들을 했겠죠.

그런데 그 장면을 예수님께서 목격하셨습니다. 14절의 기록이죠.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장면을 보고 노를 발하셨다. 화를 내신것이죠. 제자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칭찬받을만한 인정받을만한 행동이라고 여겼는데,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왠만하면 화를 잘 안내시는 분이시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화를 내셨어요. 제자들을 크게 나무라신 것이죠.

사실 예배시간에도 예배를 드리다가 막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면 예배의 분위기가 깨지는게 사실이죠. 그래서 저 뒤에 자모실도 만들고 애들이 너무 심하게 떠들면 가서 조용히 시키키고 하죠. 주로 강성미 전도사님과 제가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구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어떤 아기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그 아기가 예배당을 활보하다가 강단 위로 올라가려고 하길래 제가 데리고 내려오려고 하니까 담임목사님께서 그냥 내비두라고 하셔서 그냥 두었던 기억이 나요.

목사님도 아이들을 사랑해주시고 사랑받은 아이들이 또 목사님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잘 커서 다들 담임 목사님께 효도도 해야 하고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이 오는 것을 보고 꾸짖는 모습을 보시고 화를 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고 15절에서는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신것이죠.  이 본문을 청소년부 목장 모임 때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어요. 아이들마다 각자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아이들이 순수하기 때문에, 착하기 때문에, 죄를 많이 짓지 않았기 때문에, 등등 의견들을 제시 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유대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다는 것은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국력이 약하다는 뜻이죠. 한마디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나 그리스 사회가 가장 추앙하던 덕목은 강함이었습니다. 강한것이 옳고, 강한 것이 선한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약한 것은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육체미, 남성미가 가장 추앙을 받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고대 로마 당시 유베날리스 라는 철학자가 로마에서 행해지던 검투사 경기를 보며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요. 요즘은 그 의미가 바뀌어져서 몸이 건강해야 생각도 건강하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요. 본래의 의미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머리속은 텅 비어서 이유없이 쾌락을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말하는 의미였죠.

그만큼 그 당시에는 강함이 최상위에 있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아이는 어떤 이미지로 비춰질까요? 어린아이는 말 그대로 약함의 상징입니다. 과부와 가난한 자 병든자들과 어린이들은 성경에서 언제나 약한 자로 비춰졌습니다.

그리고 힘의 상징은 가장인 아버지에게 집중되었고, 자녀의 삶과 죽음과 장래를 결정할 모든 권리도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기도 하였고 딸이나 허약한 자나 병든자녀들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시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시대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어린아이는 늘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이렇게 존중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첫번째로는 어린아이들이 가진 미숙함과 미완성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생각할 때, 모자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배워야 하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러한 전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아이를 자신의 생각과 틀에 맞춰서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이를 억압하고 억누르면서까지 자신의 생각과 틀에 아이를 맞추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말을 잘 듣는 아이를 순종적인 아이다. 말을 잘 듣는 아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아이가 자라게 되면 부모와 갈등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 갈등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언제나 어른들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어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너희가 이 어린아이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에게 있는 그 무언가를 배우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 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배워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죠. 어른인 우리들은 무엇을 아이들에게 배울 수 있을까요?

어른들은 셈이 빠릅니다. 머리가 굵고 잔뼈가 굵습니다. 그래서 내가 얻게 될 이득과 손해를 빠르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얻을만한 이득이 있지 않으면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쓰지 않습니다.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나 아이들은 다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으려하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여러분 부르마블 게임을 아시나요? 전 세계의 주요 국가들의 땅이 있는데요. 주사위를 굴려서 그 땅을 사기도 하고 땅 위에 건물을 짓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여행자가 제 땅에 방문하게 되면 비용을 내는 게임이 있습니다.

가끔 소원이 진언이랑 그 부르마블 게임을 해요. 그러다가 제가 게임에서 좀 불리해지면 진언이가 자기 땅을 주거나 게임머니를 저에게 좀 쥐어줍니다. 그리고 진언이가 소유하고 있는 비싼 땅에 걸려서 낼 돈이 없어서 파산하게 되면 자기가 가진 방어카드를 줘서 그 상황을 회피할 수 있게 해줍니다.

게임의 목적은 본래 무엇인가요? 상대방을 빨리 파산시켜서 남은 땅을 다 가지고 승리하는 것이죠. 그런데 자꾸 죽을 것 같은데 목숨을 살려줘요. 진언이는 그냥 아빠와 누나와 이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는거죠. 복잡하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물론 승부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파산해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요. 매정하게 버리지 않습니다.

반면 어른들의 게임은 어떤가요? 피박에 광박에 쓰리고를 먹여서 상대방을 파산시키고 돈을 다 따야지 기분이 좋습니다. 중독의 수준으로 게임을 즐기죠.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맑은 마음과 단순함을 어른들이 배워야 할 것으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진무구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 순수한 마음을 배우고 닮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상한 마음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어떤 자기 삶에 이득을 바라보고 그것을 악용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즐거움과 어떤 만족스러움을 위해서 교회에 다닌다면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과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라고 생각이 드시는 분은 주일학교에 가셔서 배우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궁금한게 있으시면 아이들에게 질문해보세요.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더 성경을 많이 읽으셨을 것이고, 더 많이 예배를 드리셨을 것이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이와 같은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깨달아야 할줄로 믿습니다.

아이들이 교리를 알고, 성경을 많이 암송하고 율법을 지키고, 신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합한 자들인가요?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죠. 하지만 예수께서는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듯이 편견없이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듯이 어른들도 그리해야 합니다. 순수함이라는 것은 좋은 것을 넘어 우리의 정신과 영적인 영역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입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은 인간성이 결여되어 피폐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나누는 삶은 순수한 영혼의 상태가 아닌 이들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도 배울 것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이치와 가르침이 반드시 그러합니다. 어느 쪽이 더 일방적으로 무조건 우세하다, 높다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올바른 성품을 가지고 잘 자랄 수 있도록 그 동심을 지켜주고 바른 세계관과 성경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찾을 수 있는 그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부모가 성숙해져가듯이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배워갈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천국이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라 말씀하신 이유는 아이들이 가진 절대적인 의탁과 신뢰의 자세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부모를 의지하고 의탁합니다. 아빠들은 그런 놀이 한번쯤 해보셨을 거에요. 식탁이나 높은 곳에 어린 아이들 올려놓고 아빠를 향해 뛰라고 하는거죠. 아이들은 아빠를 믿고 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운동신경이 좋아서 떨어지면서 낙법을 잘 칠 수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죠. 아빠가 웃으면서 팔을 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아빠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기에 주저하지 않고 아빠를 향해서 몸을 내던집니다. 그리고 아빠가 받아주면 즐거워하면서 까르르 웃어대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탁의 관계 아래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앞에서 아무리 아빠가 손을 벌리고 괜찮다고 말을 해도 뛰어들지 않는 아이는 아빠의 넓은 품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기는 너무 높아 떨어지면 아플거야. 아니 죽을수도 있을거야. 왜 나는 여기에 올라와있지? 저기 앞에 있는 아빠는 믿을 수 없어 나를 떨어드릴거야. 나를 받지 못할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아이는 끝끝내 뛰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요? 심리적으로 계속 불안함과 공포심 가운데 놓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순수한 아이들 중 아버지와 깊은 유대 관계에 있는 아이들은 아빠를 믿고 뛰죠. 하지만 뛰지 않는 이러한 상태는 보통 어른들의 마음 상태일 입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사람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예수께서 가르쳐주고 계신 것이죠.

하나님 나라를 신뢰하는 믿음은 어린 아이가 아빠를 의지하여 뛰어내리는것과 같은 온전한 헌신과 의탁입니다. 나의 상황과 상태로 인해 불안해하고 무서워 하는 것이 아니라 두 팔을 벌리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 아래가 낭떠러지 일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삶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믿음의 태도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의 자세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저와 여러분의 삶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헌신과 의탁을 하나님께 드리고 계신가요? 아니면 이 세상에 동화되어버린 채로 불확실성에 사로잡혀서 두려움과 불신 안에 살아가고 계신가요

사랑하는 오라가족 여러분.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 교회에 많은 어린이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있습니다. 아이는 우리들의 미래다 라고 외치는 슬로건은 교회 뿐만 아니라 사회 여기저기서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여기 모인 우리 어른들은 우리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으로 키워야 하고 과감하게 투자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기성세대가 가진 잘못된 악습과 악행들을 되풀이 하지 않고 그 순수함을 유지하며 건강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기 모인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에게서 배울 수 있는 그 순수함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의탁과 믿음을 다시금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시다. 이미 이 세상의 가치와 구조에 동화되어버린 그 모습대로 사는 것을 멈추고, 조금 어리숙해보이고 바보 같아보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오늘 기록된 말씀처럼 순수한 신앙을 갖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순수함과 온전한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의 것을 나누고 아낌없이 사랑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 교회 공동체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누구누구 집사님을 닮았으면 좋겠다. 우리 안수 집사님을 닮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소망하며 꿈꾸는 그러한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어린아이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진실하고도 순수한 믿음이 그러한 온전한 헌신과 의탁이 우리 공동체 위에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에게 주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 자녀세대를 통하여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우리의 미래 세대에는 더욱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과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깨닫게 하심이 어린이 주일을 맞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어린이들과 그 어린이를 양육하는 부모세대와 또 교회 공동체를 이룬 모든 믿음의 식구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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