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을 향하여
누가복음5:1~11

영상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무언가 절절하고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상이죠. 저는요 국문학과를 가고 싶었어요. 이 문장이 제 가슴을 후벼파는 문장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어렸을 때 국문학과에 가고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저도 문학도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매일 밤 작은 창가에 홀로 떠있는 반쪽짜리 달을 바라보며 시상을 띄워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 뜯어으며 시를 쓰던 문학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지은 시가 한 70 여편은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언젠가 한 오십살 정도 되면 그때부터 쓴 시들을 모아서 시집을 내야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요. 한창 시를 썼던 나이가 열여섯 열일곱 정도 됐던 것 같습니다. 그때 지은 시의 제목들이 보통 이렇습니다. 천년의 사랑, 보고싶어도 말할 수 없는 것, 너의 향기, 너를 안으면, 비애 등등 대부분 짝사랑의 실패의 아픔과 무협지를 읽으며 켜켜이 쌓인 삼류 소설의 문체들로 쓰여진 것들입니다.
이제 오십이 다가오면 시집을 내야 하는데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펀딩에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아마 저의 시집이 출간이 된다면 저는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칩거할 생각입니다. 밤마다 이불킥을 하면서 왜 저런 시를 썼을까? 하면서 자책할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제가 시인이 꿈이었지만, 어느정도는 그 꿈을 이룬것 같기도 합니다. 직업 특성상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자리에 있기도 하고요. 우리가 사랑을 하면 다 시인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했던 여인도 있었고, 물론 지금도 사랑하지만요. 그때도 몇 편의 작품을 출간 하여서 아내를 꼬셨습니다. 주로 삼행시와 짧은 시를 써주면서 매력 어필을 했었어요. 그렇게 저는 꿈을 어느 정도 이룬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저에게는 다른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과학자가 되어서 인류문명에 이바지 하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꿈이 있으셨겠죠? 이루신 분들도 있고, 저처럼 어느정도 만족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요. 또 우리가 함께 보았던 영상의 어부의 고백처럼 멀어져간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자주 쓰는 용어들이 있는데요. 꿈이라는 단어랑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용어인데요. 바로 비전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비전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기독교적인 용어로 자리 잡힌것 같습니다. 이 비전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이 이천년대 초반 정도 된것 같아요. 그런데 이 비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정형화 된 이미지로 이 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전의 원래 뜻은 무엇일까요? 제가 사전적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네이버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비전(vision)이란 원래 상상력, 직감력, 통찰력 등을 뜻하거나 미래상, 미래의 전망, 선견지명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용어이지만, 예술적으로 사용될 경우 예술의 창작 및 향수(享受)에 있어서 마음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현상을 지칭한다.
생각하시는 것과 다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의미로서의 비전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비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보통 청소년들에게 많이 써요. 너 비전이 뭐니? 너가 생각하는 그것이 앞으로 비전이 있니? 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청소년 비전캠프, 청년 비전캠프 이런게 엄청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런곳에 가게되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많이 도전하죠.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세요! 하나님의 비전을 꿈꾸세요! 하나님의 비전을 품으세요! 라고 많이 얘기를 하는데요. 중요한건 정작 그 비전이 무엇인지를 모른채로 그 슬로건을 외친다는 것이죠.
그래서 청소년들이나 청년들에게 너가 이번 캠프를 통해서 가지게 된 비전이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직업적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저의 비전은 선생님이 되는거에요. 저의 비전은 운동선수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거에요. 혹은 저의 비전은 무엇 무엇이 되는 거에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전은 청소년에게만 쓰는 단어가 되버리는 것이죠.
그런데 위와 같은 대답은 사실 비전에 대한 대답은 아닙니다. 저것은 직업적 소명이죠. 그래서 아이들에게 직업에 대한 의도를 가지고 대화를 할 때는 비전이라는 단어를 쓰기보단 커서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니? 어떤 일을 하고 싶니? 라고 물어보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비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비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하는 인물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1절의 기록을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듯이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는데요. 장소가 게네사렛 호수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게네사렛 호숫가는 갈릴리 바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긴네렛 혹은 긴네롯 바다로,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긴네렛호수, 디베랴, 게네사렛 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바다는 길이가 20키로 폭이 12키로 면적이 144키로로 생각보다 큰 면적을 가지고 있었고요. 요단강에서 내려온 물과 갈릴리 주변의 따뜻한 온천수가 만나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는 바다였다고 합니다.
물고기도 많았을 뿐더러 이 주변은 농사도 잘 되어서 농작물도 풍성했다고 합니다. 농업과 어업이 활발하니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지역이었겠죠.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도 이 갈릴리 바닷가 지역에서 많은 일들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바닷가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온 무리에게 더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를 불러 한 배에 오르시는데요. 그 배가 바로 시몬 베드로의 배였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떨어뜨리시고 많은 사람들은 그 바닷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을 것입니다. 배의 주인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님 바로 옆에 앉아서 하시는 말씀을 함께 들었겠죠.
말씀을 묵상하는데 저는 이 구도가 참 인상깊더라고요. 사진을 좀 띄워주시겠어요? 내려주세요.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부였죠. 자신의 생업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도 어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업을 이어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다닐 새도 없었을 것입니다. 워낙 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니고 있으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 무리에 속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주목하여 보시고 그 배에 타시고는 육지에서 바다로 배를 띄워줄 수 있는가? 내가 저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것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 심드렁 했을 것입니다. 5절 말씀을 한번 볼까요?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이미 밤을 새도록 그물을 내리고 수고한 이후였습니다. 새벽 동이 틀때까지 고기를 잡으려고 엄청나게 고군분투 하였었겠죠. 물고기를 잡아야 상인들에게 팔아서 돈을 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마리도 못잡은 거죠.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다 해서 물고기 잡는 일을 그치고 뭍에 올라와서 그물을 정리하던 참이었던 것이죠.
2절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밤새 한잠도 못자고 수고하면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애썼지만, 물고기는 한마리도 잡지 못했고, 이제 허탈한 마음을 달래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시 배를 쓰겠다고 하신 것이죠.
베드로가 참 착한것 같아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만약에 저였다면, 밤새도록 고생고생했는데도 허탕을 친 그 상황에서 이제 그물을 씻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쉬려고 하는 그 찰나에 배좀 빌려 씁시다. 라고 누군가 말했다면 한번 째려봤을것 같아요. 일단 한번 째려보고 왜요? 뭐요? 돈은 낼거에요?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꼭 제가 나쁜놈이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상황이 그렇지 않나요? 밤새도록 고생은 했는데 무언가 성과가 하나도 없으니 맘도 헛헛하고 짜증도 좀 나있고 좀 그렇잖아요.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마 군중심리도 어느정도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렇게 많은 무리가 왜 저 예수라는 분을 따르고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여러가지 상상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시고 육지에서 잠시 떨어져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본인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퇴근하려다가 붙잡혀서 억지로 앉아서 그 말씀을 들은 것이죠.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중에 행여나, 혹시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타의적으로 나와계신 분이 있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그분이 반드시 예수님을 반드시 만날 것입니다.
베드로도 꼼짝없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씀을 듣습니다. 수많은 무리도 예수님을 주목하여 보고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이후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의 기록이죠.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여기서 베드로의 2차적 당황스러움이 찾아옵니다. 내가 퇴근도 못하고 배 태워 달라고 해서 배까지 태워드렸는데 이제는 어부인 나한테 물고기를 잡으라고 명령을 하다니. 라고 생각을 안했을까요? 생각을 당연히 했죠. 그러니 5절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이라고 먼저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직업이 어붑니다. 이미 밤을 새워서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없었어요. 여러 정황상 지금 물고기가 있으리가 만무합니다. 라는 자기의 생각을 먼저 전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의 또 다른 고백이 등장하는데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라고 말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좀 아이러니 한 고백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먼저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물고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후에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러니 지금 그물을 내려도 매한가지 일겁니다. 내가 어부 짭밥이 꽤 됩니다. 지금 물고기 없어요. 이미 그물 정리까지 하는거 보셨잖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맥락이죠.
그런데 베드로가 그런 내색은 내비쳤지만, 상반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지만 물고기를 밤새도록 못잡았지만,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다시 내리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사이에 어떤 하나가 연결점으로 걸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고백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에 태워 드렸기 때문에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었으니 조금 더 생동감있게 집중해서 들었을 수 밖에 없죠. 그 누구도 베드로를 방해하는 사람이 없었고, 이미 뭍에서 떠나 일렁이는 바다 위에서 예수님과 단 둘이 있는 특별한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위에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씀을 듣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이후 분명히 베드로의 마음에 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위의 5절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제가 평생을 어부로 살았고, 어부로서의 노하우와 삶의 방식과 물의 때를 알지만, 내가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겠다. 라고 고백하고 깊은곳에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말씀에 의지하겠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단지 깊은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는 그 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했던 말씀에 의지하여, 라는 고백의 의미는 예수님 당신이 배 위에서 말씀해주셨던, 그 진리에 대한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물 깊은 곳으로 가는 것 자체가 저에게 큰 의미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배 위에서 들려주셨던 그 말씀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서 순종함으로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라는 고백이죠.
이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이미 우리가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듯이 정말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질듯이 많은 물고기가 잡혀서 동료를 불러서 두 배에 물고기를 담았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배가 물에 잠길 정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경험한 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서 자신을 떠나시기를 요구합니다. 8절의 기록이죠.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라고 고백합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너 이런 이런 죄를 지었구나. 라고 단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깊은곳에 그물을 내려라. 라고만 말씀하신 것이죠.
그러나 그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린 베드로가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을 경험하고, 그 이후 예수님께 엎드리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심적인 변화를 캐치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5절에 예수님을 향해서 선생님, 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놀라운 이적을 경험한 이후 8절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 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요. 예수님을 향한 고백이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바뀐 것은 베드로가 어떠한 심적인 충격과 새로움을 맞이 하였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진리 앞에 마주한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의 말씀이죠.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절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비젼을 향하여 입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비전이 있었나요? 사실 비전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왔던 것이죠. 그냥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베드로에게 비전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낚는, 사람을 취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비전이 생긴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 제가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이 비전을 직업적 소명으로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 비전은 이런거야 나는 이런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거야.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목표를 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위치에 올라가거나 자신이 세운 목표나 목적에 다다르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비전과 다릅니다.
제가 읽은 책중에 비전에 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띄워주세요.
“우리는 비전을 내가 어떤 것을 계획하고 어떤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도래하는 것’입니다. 비전이 미래로부터 달려오는 것을 보는 것이며, 다가올 미래가 현재화 되도록 응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애씀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미래가 우리의 시간을 열어 젖히며 ‘요청’ 하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비전에 대해 기도할 때 기준을 나에게 자꾸 두지 말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열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잘 듣고 계획하십시오! 반드시 이루실 언약을 믿고 꿈꾸십시오. 비전의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완료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비전은 내가 무엇을 찾는 것, 내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은 다가오는 것이 비전입니다. 주체가 다른 것이죠. 내가 무엇을 해야지. 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비전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뜻하신것,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만나는 것이 비전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내용은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라는 한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이었는지를 예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베드로가 그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으신 것을 보고 난 이 후 베드로는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말씀이죠. 1절에 보면 디베랴 호숫가가 등장합니다. 바로 베드로가 처음에 예수님을 만났던 그 장소죠.
21장 3절의 기록인데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함께 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닭살이 돋을만큼 오늘의 본문과 너무나 똑같은 장면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시기 위해 바닷가에 서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물으시죠. 5절의 기록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그러자 요한이 베드로를 향해서 주님이시다. 라고 말하자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왜 뛰어들었는지는 나중에 요한복음의 본문을 다룰 때 좀 더 깊게 다루도록 하고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날 자신에게 주셨던 비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원래 자신이 먹고 살았던 어부라는 직업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실패와 낙망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만나주시고 베드로를 향해 똑같은 질문으로 세 번을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지? 내가 너한테 주었던 그 비전을 기억하고 있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너가 잊지 않았지? 너가 날 사랑한다면 그 비전을 놓지마. 내가 너에게 맡긴 그 사람들을 잘 돌보고 보살펴주길 바래. 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이후 베드로는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다가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가 자신의 비전을 끝내 완수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삶의 자리로 옮겨와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한 비전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 무엇인지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비전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까?
제가 위에서 한 책의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비전은 도래하는 것이다. 현재속에서 미래가 우리의 시간을 열어젖히며 요청하는 것이 비전인 것이죠.
우리가 매년 11월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저번주 주일 목자 모임 때 짧게 다니엘 기도회의 소감을 나눈적이 있는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교회에 어떤 영적인 흐름을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교회 건축에 대한 말씀과 영적인 기류들이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서 임하였던 것을 영적으로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는 이제 새롭게 건축한 이 땅에서 우리를 향하여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발견해야 한다. 라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오라교회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발견하기 위해 깨어서 준비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 위에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죠.
베드로가 그 비전을 발견하기 전에는 어부라는 직업과 자신의 생각과 관점과 구조 아래 갇혀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고백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겠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기분과 판단과 오랜시간동안 축척된 경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밤새 물고기를 한마리도 낚지 못하여 낙심하고 좌절한 상태로 오늘 하루 물고기 못잡았다고 하늘이 무너지나? 라고 푸념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듣고난 후 내가 저 말씀을 의지하겠다. 라고 결단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놀라운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예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를 떠나주세요.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그런 베드로를 일으키시며, 베드로를 향한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앞으로 너는 더이상 물고기를 낚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두움 가운데 헤메이고 있는 이들을 빛으로 이끌어내는 삶을 살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죠.
사랑하는 오라 가족 여러분.
우리 공동체 위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생기와 활력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성취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부르는 찬양에도 이런 가사가 있죠.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저는 오늘 각 목장마다 숙제를 하나씩 드리겠는데요. 말은 숙제지만 엄청난 선물이 될 것입니다. 기쁨과 감격이 있는 잔치의 참여하는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목장이 모이시면 우리 교회 공동체에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지 적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하실거야. 이 비전이 우리 교회를 통해 또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라고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을 발견해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비전이 우리교회 위에 도래하게 될 때 우리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교회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풍성한 선물을 받게 될 것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어려워 보일 수 있습니다. 아직 대출금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이자가 매달 얼마씩 나가기 때문에 재정적인 여유가 없다든지 하는 그런 현실은 여전히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처한 상황과 구조속에 갖혀서 부정적인 생각과, 할 수 없다는 말과 낙심한 마음으로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채 부정적인 입술의 열매대로, 그러한 마음과 생각의 구조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꿈을 꿀때, 하나님의 비전을 가질 때, 그 비전을 향하여 달려갈 때,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비전을 정말로 발견하길 원하십니까?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십니까?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는 것을 보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준비하십시오. 비전의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완료된 시간입니다. 이미 이루시고 완성하신 것을 마주할 준비를 하십시오.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실 때,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는 음성이 들려올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를 믿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주님께 삶의 방향키를 맡겨드리고 주님과 함께 그 믿음의 여정을 함께 해쳐나가는 생기넘치며 기대와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시간 함께 찬양하고 한번 합심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찬양하실 텐데요. 이 가사의 고백은 오늘 함께 나눈 본문의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 찬양의 가사의 고백이 우리의 진실하고도 진실한 믿음의 기도로 올려지도록 찬양합시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베드로를 부르시고 그의 삶에 새로운 비전을 주시고 좌절과 낙망했을 때도 그 비전을 일깨워주셔서 삶의 끝까지 주님을 따랐던 비전의 사람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꿈이 우리의 비전이 되게 하셔서 이제는 일어나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꿈꾸고 노래하고 기대하며 소망가운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자들이 아니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자들이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우리의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도래하는 하나님의 비전을 향하여 다시 한번 새롭게 도약하는 우리 오라교회 공동체가 되게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복되고 가치있게, 밀도있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고 주님을 다시 만나는 영광스러운 그날,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